‘한국전쟁’의 저자 박태균(49)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베트남전쟁’을 냈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 이유를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적 관계에서 파악하고, 파병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두루 조명하면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작년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50년이 되는 해였고, 올해는 베트남전쟁 종전 40주년이다. 지난 주 베트남전쟁 연구자인 윤충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의 책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푸른역사)가 출간됐고, 올 초 저널리스트 고경태가 쓴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한겨레출판)라는 책도 나왔다. 영화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네 차례 파병을 통해 총 32만5000여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보냈다. 이 중 5000여명이 전장에서 전사했고, 1만2000여명의 참전 병사들이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았다.
베트남전 파병은 한국 역사 최대 규모이자 최장 기간 해외 파병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면 최대 파병국이었고, 미군이 철수를 시작한 뒤에도 한국군은 남아 있었다. 1972년의 경우 한국군은 미군(2만4200명)보다도 더 많은 3만7438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1972년에 한해서 본다면 이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8년 반의 베트남 파병 기간은 우리 사회의 현재를 만든 시간이었다. 이 기간 한국 경제는 국민총생산 연평균 8% 이상의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주민등록제도가 본격화되고 예비군이 창설됐으며 미국 문화가 대거 유입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과 3선, 유신 선포에는 전쟁 특수와 그로 인한 경제성장이 바탕이 됐다. 또 현대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 신동아 등이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해 ‘10대 재벌’에 진입했다.
이런 사실들은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이룩한 한국의 산업화 서술에서 빠진 부분을 말해준다. 박 교수는 “베트남 특수를 고려하지 않고 196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과 1970년대 초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짚는다.
베트남전쟁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불편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번 돈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것을 떳떳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인가? 미국에서도 베트남전쟁은 잘못된 전쟁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와 그로 인한 경제 발전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또 다른 질문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우리의 사죄와 책임을 이대로 계속 모른 척해도 되는 것일까?’하는 것이다. 2000년 구수정 박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80여건이 되며, 9000여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박 교수는 “일본의 역사 인식을 이야기하든, 미군의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이야기하든 모든 문제는 베트남에서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베트남에서도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우리의 기억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베트남전쟁”
입력 2015-09-03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