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통' 판사 천종호 "지금처럼 로스쿨 선발 방식이었다면 저 같은 사람 판사 되지 못했을 것"

입력 2015-08-31 14:27 수정 2015-09-01 14:07
부산가정법원 천종호 판사 사진=도서출판 우리학교 제공

부산가정법원 천종호(50) 판사는 청소년관련 기관과 단체, 법조계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호통 판사’ ‘호통 대장’ 등의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재판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비행청소년들은 ‘바보’ ‘천10호’ ‘선생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천10호’는 소년원법에 의한 소년원 송치 처분 기간 ‘10호 처분’을 말하는데 그 기간이 2년으로 최고형이나 다름없다. 한데 천 판사가 10호 처분을 잘 내려 ‘천10호’라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천 판사는 오늘도 법정에서 매서운 호통으로 비행소년들을 벌벌 떨게 만든다. 경우에 따라 소년들의 부모에게라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나면 그 소년들의 처지에 눈물을 흘리고,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시민활동가’처럼 뛴다. 세 자녀를 둔 평범한 아버지 마음에서다. 그의 친구 곽경택(영화감독)은 “천종호는 많은 돈도, 감춰진 허세도, 대단한 출세욕도 없는 그냥 맑고 강직한 판사”라며 “그와 그를 돕는 분들께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신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천 판사가 법정과 법정 밖에서 비행청소년들과 함께한 이야기는 ‘학교의 눈물’(SBS TV) 등 방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우리 국민이 청소년문제의 현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천 판사를 24일 부산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신앙인’(부산 금정평안교회 피택장로)이라는 이유로 폐가 될까 해서다. 그의 집무실에 이런 액자가 걸려 있었다.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이 글은 지난 29일 보도됐으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모면' 등의 내용을 추가하여 재작성했다.)

- ‘천10호’ 별명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소년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내려지는 결정을 ‘소년보호처분’이라고 합니다. 1호에서 10호까지 규정되어 있어요. 1~5호까지는 사회봉사나 보호관찰하는 처분이죠. 6~10호까지는 소년보호시설에 격리하거나 소년원에 보내는 처분입니다. 1개월은 8호, 6개월은 9호, 2년은 10호죠. 따라서 10호 처분은 매우 무거운 경우입니다. 9호 처분보다 10호 처분이 오히려 소년들에게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검정고시 합격을 위해 또는 기술자격증 취득을 위해서죠. 소년들을 위해서라면 9호 처분을 할 수 있을 때도 10호처분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년들은 내가 10호 처분을 많이 낸다고 생각하여 천10호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천은 제 성이고요.

- 원망도 듣겠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녀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들겠죠. 그렇게 학교(소년원)에 보내진 녀석들에게 ‘처음엔 판사님 원망 많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배울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편지를 받습니다. 제가 당장 원망을 받는다 해도 10호 처분이 아이의 장래에 도움이 된다면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에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엄격한 판결이 당연하고요. 다만 처분이후라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소통하고, 올바로 자라는데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그는 실제 지난 6년 간 사법형그룹홈 설립에 나서 창원 등 경상도지역에 14곳의 청소년회복센터를 열었다. 또 비행소년 전문 상담교육기관 ‘경남아동청소년상담교육센터’, 정규학교 과정 ‘국제금융고 창원분교’ 등도 설립했다.

- 호통은 왜 치십니까. 통상 법정 분위기와 많이 다를 텐데요.

“사건 당 할애되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요. 3~4분 정도니까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소년과 보호자에게 조그만 깨우침이라도 주려면 호통 칠 수밖에 없습니다. 죽비소리 효과라고 할까요. 방청객들은 ‘호통치료’라고 합니다. 호통 받은 소년들 중 ‘마치 아버지한테 사랑의 질책을 당한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어른들에게 강하게 지적 받지 않아 여기까지 온 거죠.”

- 부모나 보호자는 왜 혼냅니까.

“애들을 위한 퍼포먼스 같은 겁니다. 평소 사이가 나빴던 소년과 보호자가 순식간에 하나로 묶여요. 자신 때문에 부모가 판사에게 야단맞는 것을 보면 죄책감과 더불어 본능적으로 부모 편이 됩니다. 부모 자식 간의 정이 되살아나 일체감을 형성하는 거죠.”

- 인상이 부드러우신 분이 버럭 하시면 후유증도 만만찮을 듯 합니다.

“재판 마치면 목이 쉬는 등 3일 가량은 쉬어야 회복될 정도로 파김치가 되죠.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년들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 수가 없습니다.”

- 격언과 시낭송, 편지 등도 활용하시죠.

“갈등이나 분노 상황에서 공격적 행동을 일삼던 종수(가명)라는 아이의 심리에서 종수와 종수 어머니에게 각기 일본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의 ‘약해지지 마’와 ‘아들에게’를 낭독하게 하게 했습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힘에 겨운 일 생기면 엄마를 떠올리렴…’ 등과 같은 내용이죠. 적대감 뭉치의 아이가 한결 부드러워지죠. 법정에서 부둥켜안고 웁니다. 편지는 더하죠.”

- 소년법정은 성인 법정과 차원을 달리하죠.

“아들 몸에 조폭 문신을 보고 자책감에 혼절한 어머니, 암투병 중에도 나와 자식을 제발 돌려달라고 하는 어머니, 자식 구금되어 있는 동안 식음 전폐하고 눈물로 보내다가 ‘집으로 데려가’라는 판사 말에 긴장이 풀려 쓰러져 119구급차에 실려 가는 어머니, 가출 후 원조교제로 생계 이어가던 딸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부모, 가슴 밑바닥서부터 터져 나오는 통곡을 주체 못해 꺼억 꺼억 우는 아버지 등…말로 다 할 수 없죠.”

천 판사는 소년범죄가 살인·성폭행 등 흉포, 잔인화 되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를 두고 사회에서는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쏠리고 있다. 그는 엄벌과 관용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소년범죄는 경미한 학교폭력범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들을 위한 재교육이나 재비행 저지를 위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 마련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 소년범 현황이 어떻습니까.

“매년 10만명 정도의 소년범이 발생합니다. 그 중 중범죄로 소년교도소나 소년원에 생활하는 5000여명을 제외한 9만5000여명이 사회로 돌려 보내집니다. 그러면 재범 방지가 관건이겠죠. 한데 국가가 제공하는 장치는 보호관찰제도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2013년 기준 재범률이 41.63%입니다. 이들이 그대로 성인이 되는 거잖아요. 걷잡을 수 없죠. 또 보호처분의 경직성, 소년원 생활실 과밀에 따른 악영향 등 시급한 문제가 많습니다. 한데 비행소년문제는 선거권과 직접 관련이 없다보니 국회 등 사회가 무관심합니다.”

- 가정해체가 소년범 발생에 주된 요인인 것 같더군요.

“소년범 48%가 결손가정 아이들입니다. 또 결손가정은 빈곤문제를 안고 있는데 전체의 70%는 결손·빈곤에 따른 악순환이죠. 그들을 격리하기보다 준(準) 가정과 같은 그룹홈 등을 통해 ‘사회적 지위 상승의 희망’을 주어야죠. 아이들에겐 어떤 형태든 ‘사랑의 가정’이 필요합니다. 사법적그룹홈을 그래서 시작한거고요.”

- 법률적 판단만 하셔도 될 텐데 굳이 힘든 일을….

“2010년 창원지방법원 소년부를 맡게 되면서 가정의 해체로 인한 소년 비행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 어린 시절과 같은 환경에 놓인 아이들이죠. 문제는 우리 사회가 보호소년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에게 정작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건 부담스러워 하죠. 심지어 교회도요.”

- 천 판사님은 법조인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롤모델이시더군요.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같이’라는 ‘말씀’에서 여러 가지가 느껴집니다.

“저는 도시빈민의 아들입니다. 지금은 관광지인 부산 감천마을 인근 판자촌 아미동에서 성장했어요. 육군 특무상사 출신인 아버지(작고)는 목수였고요. 7남매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육성회비를 못내 교실서 쫓겨났고, 수학여행은 꿈도 못 꿨죠. 수돗물을 배를 채우며 세끼조차 제대로 해결 못한다는 수치심이 컸습니다.”

- 교회 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함께 놀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전도팀을 따라 죄다 교회(현 아미동 아름다운교회) 간 거죠. 뒤따라 교회 갔습니다. 고신 측 교회라 엄격했어요. 중고등부 회장 등을 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부산·경남지역서 유명한 무척산기도원으로 수련회도 가고요. 7형제나 되니 집에선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숙제만 하고 바로 자버리죠. 그리고 새벽 같이 일어나 교회 가서 새벽기도 하고 공부했습니다. 교회는 장의자에 누울 수도 있고…하하. 그러니 공부 못하면 안 되잖아요.”

- 주일을 지키기 위해 수학여행을 안가신건 아니죠.

“친구들에게 주일성수 때문이라고 둘러댔죠. 실제는 수학여행비를 못 내서였고요. 수학여행 못간 친구가 10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주일 낀 여행 일정 때문에 안간 거였어요.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 자녀였던 거죠. 그 친구들에게 ‘나도 그렇다’라고 해야 했죠.”

- 과외는커녕 부교재 살돈도 없는데도 공부 재능이 있었던가 봅니다.

“아뇨. 똑똑한 건 아닙니다. 제가 좀 숫기가 없어 ‘삐뚤어 나갈 능력’도 없었어요. 공부와 교회 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셈이죠. 게다가 색약이어서 반에서 1등을 해도 의대나 공대 갈 조건이 안됐어요. 키도 165cm 정도 밖에 안 되니 육사나 경찰대 진학도 힘들었죠. 무조건 등록금 싼 서울대 법대가 목표인데 체력이 달려 성적을 제대로 못 받았어요. 가난은 그 무렵에도 계속돼 입시원서도 못살 형편이었죠. 재수는 언감생심이고요. 대입을 자포자기 한 상태가 됐습니다.”

- 천사가 나타났다면서요.

“대학 원서접수 마감 날 아미동서 터덜터덜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을 쪽까지 걸어 내려왔는데 학교 친구를 만났어요. 원서접수 마감시간 다 됐는데 뭐하냐고요. 내 처지에 무슨 대학이냐고 했죠. 친구가 ‘야 무슨 소리야 서둘러’하며 원서를 사줬어요. 당시는 서점에서 원서를 팔았잖아요. 부산 사람이면 다 아는 문우당이었죠. 그리고 모교인 부산남고에 들러 지원서 작성해 부산대에 가니 접수마감 30분전이었습니다. 그가 박명규(세무사)라는 친구였죠. 재작년 창원에서 열린 제 책 출판기념회에서 그 친구를 소개하며 ‘하나님이 보내준 천사’라고 얘기했더니 ‘내가 그랬냐?’ 하더군요. 청소년 특강이라도 있으면 이 사례를 얘기해요. ‘여러분의 배려가 누군가에게 삶의 전환점을 마련한다’고요.”

- 가난을 피해 군대 가시고, 전역 후에도 희망이 없었죠.

“가난은 삶의 의지를 꺾는 무서운 질병이죠. 부모와 형제들, 교회 식구들, 이웃들 아니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었을까 되돌아보곤 합니다. 내 인생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입니다. 이들 덕에 5전 6기만에, 늦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까요.”

- 요즘 로스쿨 제도 같으면 법조인이 되기 쉽지 않았을 것 같군요.
"아마도 판사 되지 못했을 겁니다."

- 합격 후 ‘가난한 아내’를 버리지 않으셨더군요.

“사시 준비하며 사귄 대학 동창인 아내(도인자·교사) 역시 저처럼 가난한 집 딸이었어요. 사시 합격 후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데요. 이러다 아내에게 상처가 되겠다 싶어서 바로 결혼했습니다.”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서울 봉천동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결혼 직후 부산서 TV와 몇 가지 신혼살림을 싣고 이삿짐 운반차 운전석에 타고 상경했던 것이다. 자리가 비좁아 운전사 눈치를 봐야했다. 그들은 2007년까지 제대로 된 자신들만의 집을 갖지 못했다.

- 부인보다 ‘꼿꼿했던 신앙생활’이 역전 됐다면서요.

“하하. 제가 고신파 교회를 다녀서 좀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한데 나중에 역전 됐어요. 저는 판사 생활 20년만 하고 나와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 했어요. 제 형제자매 누구도 대학 나온 이가 없어요. 돈을 벌어 돕고 싶었죠. 그러려면 붙임성도 있어야겠기에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큰 교회 다녀야 하나 생각했죠. 30대 초부터 그런 거죠. 그런 저를 위해 아내가 기도했어요. ‘당신이 이러려고 판사 된 거 아니잖나’고 하더군요. 아내와 장모님 기도 아니었음 정신 못 차렸을 겁니다. 2006년 무렵 술 끊었어요.”

- 올 봄 펴낸 ‘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등 두 권의 저서 인세 등을 비행청소년을 위해 다 쓰셨더군요. 특강비 등도 예외 없고요. 형제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우리 대개가 소시민으로 살지 않습니까. 제 형제들도 그럽니다. 제가 하는 일 이해해주는 형제들입니다. 많지는 않아도 늘 나눠 쓰려는 형제들이고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추구하면 안 됩니다. 저는 공의에 대한 판단을 신탁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 최근 교회 초청 비행소년문제 특강을 통해 청소년지원센터 승합차 운영 문제 등을 해결해 주셨죠.

“제 힘이겠습니까. 교인들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신 거죠. 서울 온누리교회 마리아행전팀 초청에 휴가를 내서 올라가 특강을 했어요. 3000여명이 참석해주셨죠. 14군데 센터 중 3곳의 승합차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 정치인이 되시면 국회 등이 무관심한 ‘비행소년전용 공동생활가정’ 입법 등이 수월하실 텐데 정치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전혀요.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법조인이 법복 벗었다고 부와 권력에까지 욕심내면 안 되죠. 성서적이지도 않고요. 저는 비행소년을 비롯해 법조인이 되려는 후대들에게 모범이 되는 법조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후기. 천 판사에게 폐가 안 되리라 믿고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요? 사랑과 신앙이 아니면 변화가 안 됩니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