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원은 의원들 중 여론조사 하위 5명 안에 들었다더라.” “대통령 눈 밖에 난 B중진 지역구는 전략공천한다더라.”
18대(2008년)와 19대(2012년) 총선을 몇 달 앞둔 여의도 정가에는 이런 류(類)의 소문이 무성했다. 주류 계파가 공천권을 휘둘러 상대 계파를 쳐내는 모습이 반복됐던 당시 전략공천이라는 미명 아래 등장한 정체불명의 살생부는 현역 의원들을 잠 못 들게 했다.
20대 총선을 7개월여 앞둔 여의도 정가엔 여전히 경쟁자를 흠집 내기 위한 루머가 난무하지만 과거와 다른 설(說)도 등장한다. “C 전 의원이 ○○에 출마하려고 책임당원명부 3000장을 제출했다더라”는 식이다. 또 과거와 달리 공천 정보를 얻기 위해 국회와 중앙당사를 기웃거리는 지망자를 찾아보기 힘든 것도 달라진 풍경이다. 반면 미리부터 지역구를 달구는 ‘하방(下放)’은 요즘 대세가 되고 있다. 현역 의원들도 정기국회가 코앞이지만 본회의나 상임위 일정이 잡히지 않으면 여의도엔 잘 나타나지 않는다. 20년 이상 국회 보좌관으로 활동 중인 한 인사는 “이번 총선만큼 후보자들이 일찌감치 지역을 누비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 한 인사는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일단 국·영·수는 파고 보자는 수험생의 심리와 비슷하다”고 풀이했다. 예비후보 등록조차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의원, 총선 지망생들이 지역에 ‘올인’하고 있는 게 공천·선거제가 확정되지 못한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실제 정치권은 공천, 선거제가 선거에 임박해 졸속으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각자도생(各自圖生)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줄 세우기’ 폐단을 막기 위해 공천 개혁을 논의중이만 여야와 계파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논의는 공전중이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선거 지역구도 조정해야 하나 농·어촌과 도시지역,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의석 배분을 놓고 이견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총선 전략 마련에 필수 선결 과제들이 모두 풀리지 않아 7개월이 넘는 기간 ‘깜깜이 선거’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주자들은 일단 얼굴 알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어찌됐든 하향식 공천보다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또는 상향식 공천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인지도 높이기에 나선 것이다.
시대정신연구소 엄경영 대표는 30일 “공천 기본 베이스가 경선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높아지자 선거인단뿐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이기기 위해 인지도를 높이고 핵심 지지층을 모으기 위해 미리 뛰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라는 공식이 통했던 여야 텃밭 도전자들도 과거 당 지도부나 언론 등을 대상으로 벌이던 홍보 전략을 버리고 한명이라도 더 지역 유권자를 만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경북 안동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새누리당 권택기 전 의원은 “아직 선거에 관심이 높지 않아 인지도를 높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안동 시민을 만나기 위해 6개월째 지역에서 뛰고 있다”고 밝혔다. 전북에서 새정치연합 공천을 노리는 한 인사도 “신당 창당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일찌감치 권리당원을 모집하고 지역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경선에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인지도에선 앞선다고 하는 현역 의원들도 핵심 지지층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응답률이 높지 않아 핵심 지지층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여론조사 경선 승리의 ‘키포인트’가 됐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배덕광 의원의 경우 빅데이터를 활용한 ‘마이크로 타게팅’ 기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배 의원실 관계자는 “유권자를 고객 서비스 대상자로 보고 수시로 연락하면서 축적된 데이터를 성별·나이·정치적 성향 등으로 분류해 유권자의 수요에 맞는 의정보고를 문자로 수시로 발송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이 지역민의 고충을 듣고 처리해주기 위해 마련한 ‘민원의 날’ 행사도 여야 의원들이 앞다퉈 벤치마킹하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같은 당 경쟁 후보가 “건강이 좋지 않다” “다른 지역에 출마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이를 진화하기 위해 지역에서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한 여당 의원은 “대통령이 이번 정기 국회에서 4대개혁에 주력할 것을 주문했지만 사실 마음은 다들 콩밭에 가 있다”고 총선을 앞둔 의원들 분위기를 에둘러 전했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
깜깜이 선거가 바꿔놓은 선거 풍경...인지도 제고, 핵심 지지층 확보 위해 무조건 뛰자
입력 2015-08-30 1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