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도라산역 벽화 일방적 철거·소각 대법 판단은

입력 2015-08-27 16:27

원로 미술가 이반(75)씨의 도라산역 벽화 작품을 최소한의 통보절차도 없이 철거한 뒤 소각한 정부처분은 위법하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비록 소유권이 정부에 있다 할지라도 예술작품을 함부로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다.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27일 이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씨에게 위자료 1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씨는 2007년 5월 정부 의뢰를 받아 도라산역 내 벽면과 기둥에 설치될 벽화 14점을 완성했다. 계약금 8000만원에 작품에 대한 소유권은 정부가 갖기로 했다.

그러나 이씨는 불과 3년도 지나지 않아 도라산역을 방문한 지인으로부터 “벽화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씨가 뒤늦게 자초지종을 묻자 도라산역의 남북출입사무소 측은 ‘작품이 전반적으로 어둡고 난해하다’ ‘정치 이념적 색깔이 가미된 민중화 같다’ 등의 이유로 철거했다고 회신했다. 심지어 작품은 곰팡이를 뒤집어 쓴 채 사무소 내에 방치되다가 소각됐다. 작품을 철거·소각하면서 작가에게는 한마디 상의나 통보조차 없었다. 이씨는 2011년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소유권이 정부에 있기 때문에 해당작품의 철거·폐기에 문제가 없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이미 설치 이전부터 제기됐던 사유를 들어 작품의 원형을 크게 손상시키는 방법으로 철거한 다음 소각한 행위는 객관적 정당성이 없어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이씨가 자신의 작품이 장기간 온전히 유지되고 전시될 것이라 기대하는 ‘인격적 이익’을 침해했다는 설명이다.

법원은 더 근본적으로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지며,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는 헌법 22조를 판결 근거로 삼았다. 국가는 예술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장려할 책무 또한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따라서 예술작품을 폐기하는 데는 충분한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극히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 미술품 관리규정에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예술작품을 폐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난해함’이나 ‘어두운 이미지’ 같이 이미 이씨의 작품이 설치되기 전부터 제기됐던 일부 문제들을 다시 철거의 이유로 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국가가 일정한 잣대 아래 작품을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예술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