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조선인노동자 목숨을 앗아간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 사건 70주년 추모 행사가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에 있는 추모비인 ‘우키시마마루 순난(殉難)비’ 앞에서 열렸다.
이 사건은 1945년 8월 24일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를 태우고 아오모리현에서 출항해 한국으로 가던 군함이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폭발해 침몰한 사건이다. 이때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했다고 일본 정부가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인 생환자와 유족은 일본에 의한 고의 폭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일본인 교사가 규명에 앞장서 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우리 정부는 2005년부터 5년에 걸쳐 진상조사를 벌였으나 일본 정부의 발표가 부정확하다는 사실 외에는 폭발 원인이나 사망자 수에 관해 정확한 결론을 내지리 못했다.
올 70주년 행사는 실체 규명에 앞장서온 일본 지식인 등 300~400명이 참석해 조용히 치러졌다.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민단과 조총련의 인사가 비공식 참여했을 뿐이다. 지난해 행사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일본 방문단 10여명이 참가해 일본 정부에 해결을 촉구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은 24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우키시마마루호 사건 70주년을 맞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조선통신은 “일본 당국의 의도적인 조선인 대량학살 흉계에 따라 조직되고 집행된 이 사건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린 징용자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조선 사람들이 검푸른 바다에 수장됐다”며 “일본은 죄 많은 과거사를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현장을 지켜본 일본 문제 프리랜서 김동선씨가 사건 경위와 행사 소식을 전해왔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수몰 70주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한일간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징용한인배상문제등은 한국이 추궁하고 일본은 발뺌하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70년 전인 1948년 8월 24일 마이즈루(舞鶴)항 앞바다에서 일어난 징용한인귀국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 폭침사건은 일본인에 의해 알려지고 일본인에 의해 추도되는 이례적 경우이다.
일본정부 추산 500여명, 한국 측 추산 3000여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당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추도식이 매년 이 날이면 마이즈루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올해로 사건 70주년이자 추모식이 시작된 지 52년 째. 뜻 깊은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는 마이즈루시를 방문했다. 마이즈루시는 유명관광지도, 상업지역도 아니다. 주민 8만 명이 살고 있는 이 곳을 한국인이 찾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를 도시중심에 있는 고로가타케산정에서 내려다보았다.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내해는 파도조차 숨죽인 평온한 바다이다. 하지만 70년 전 사건을 기억하는 노인들이나 이를 전해들은 시민들에게는 그 바다는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징용 한국인 해방과 함께 귀국하다 참변
70년 전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오미나토(大溱)를 출발한 배는 부산을 향해 항해를 하고 있었다. 이 배에는 아오모리(靑林)등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하던 징용한인 수 천 명이 정원을 훨씬 초과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해방의 소식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간절한 마음과 이 배를 타지 못하면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소문에 쫓겨 다급하게 배에 올라탔다.
정원이 800여명인 우키시마마루호는 원래 상선이었지만 전쟁 중 일본해군에 차출돼 아오모리와 홋카이도 사이를 운항하고 있다가 해군사령부의 명령으로 부산을 향해 출항한 것이었다.
24일 일본선박의 운항을 금지하는 미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우키시마마루호는 해군본부가 있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내해는 그 날도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저녁 5시가 지날 무렵 배에서는 두 번에 걸친 엄청난 폭음이 들리고 배는 한 가운데가 절단이 된 채 그대로 미끄러져 갔다. 결국 배는 V자로 꺾인 채 침몰하기 시작했다. 배 안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징용 한인과 그 가족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폭음을 들은 인근 지역의 어선들이 노를 저어 달려와 구조작업을 했지만 여기서 살아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일본 젊은 교사, 1962년 참사 진상 폭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사건은 일본해난사고가운데 최대 규모의 희생자의 수, 사건의 원인, 이후 사건 은폐 등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의 원인에 대해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은 당시 함장이었던 요리우미 깅고(鳥海金吾)가 사건 직후 타전한 전보에서 촉뢰라는 표현을 쓴 데에 기인해 미군이 전쟁 중 바다에 떨어뜨린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부산행을 기피한 일부 승무원들의 자폭설에서 징용한인들의 귀국을 방해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음모라는 설까지 원인에 대해 분분했지만 정확한 사건의 규명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당시 아무리 종전직후의 혼란기라고는 하지만 일본해난 사고 가운데 최대급인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언급은 한 줄도 찾기 힘들다.
그냥 사람들의 기억너머로 사라졌을 이 사건을 끄집어 내 세상에 알린 것은 1962년 마이즈루시 중학교 교사들이었다. 1962년 마이즈루중학교에 부임해 온 젊은 교사 노다 미키오(작고)는 일본인학생과 조선인학생간의 분쟁 원인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임을 깨닫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이 사건을 알게 됐다.
그는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데 놀랐고 사건의 본질이 결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에 있음을 깨닫고 뜻이 맞는 노다 미키오(野田幹夫), 수기나가 야스로오(須永安郞), 요에 가츠히코(余江勝彦)등 지인들을 모아 ‘우키시마마루호 순난자추도실행위원회’(현재 ‘우키시마마루호 순난자를 추도하는 모임’)를 만들었다. 이들은 모임을 통해 사건을 조사하고 추모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규모 법회로 시작했던 추모행사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추모공원 설립, 추모비 건립 등으로 이어졌다. 1989년 쇼와천황의 서거했을 때 쇼와시대를 정리하는 특집이나 연표 등이 제작되는 점을 노려 각 출판사에 우키시마마루사건이 포함되도록 편지로 사건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도 추모모임이었다.
수몰 70주년, 무심한 한국 정부…北 배상촉구
이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우키시마마루사건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우키시마마루사건에 대한 기록은 역사연표나 신문기사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1994년 교토의 영화단체가 우키시마마루사건을 다룬 영화 ‘아시안블루’를 제작할 당시에는 많은 시민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영화가 완성된 뒤에는 전국상연운동을 펼치는 등 큰 힘을 보태왔다.
올해 열리는 추모행사에는 300~400여명의 시민과 단체장들이 참여했다. 민단, 조총련으로 나뉘어 반목하는 재일 한국인들도 한 마음으로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렸다. 현재 회장을 맡아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는 요에씨는 이 날도 추모식 준비를 위해 기념동상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치마저고리차림의 여성과 아이, 남자들로 이루어진 한인피해자추모동상을 제작한 것도 바로 요에씨이다.
당시 마이즈루중학교 미술교사였던 그는 이 조각품제작을 의뢰받은 것을 계기로 우키시마마루사건을 알게 됐다. 그게 벌써 37년 전의 일이다. 매해 추모행사를 준비해 온 그에게 올해 가장 기쁜 일은 인근도시 교토의 중학생들이 행사준비를 위해 단체로 찾아온 것이다.
한인피해자 추모동상 제작 요에이씨 “아직 진행형”
역사를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거리인 그에게 “70년이 지났으나 이 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 만큼 할 일이 많은 데 이 일을 주도해 갈 젊은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요에씨 등이 그 동안 추모행사를 가져오는 동안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서야 비로서 진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광주시에서는 ‘아시안블루’영화상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베정권과 일본시민들이 우경화를 걱정하는 한국에서 아직까지 이 사건을 제대로 알고 규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글·사진=일본문제 자유기고가 김동선 weeny38@empas.com
[단독 르포] 한국인 폭침 수몰 500여명…우키시마마루호사건 70주년에 무관심한 정부
입력 2015-08-25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