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버릇 고쳐주자” 걱정되는 인터넷 전쟁불사론

입력 2015-08-24 17:19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24일 파주통일대교에서 시위를 하고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빨갱이들 버릇 고쳐줄 때가 왔다.” “북한이 지도에서 사라지도록 씨를 말려야 한다.” 지난 20일 북한군 포격 도발을 알리는 국방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이런 댓글이 5000개 이상 달렸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총 들고 학도병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싸울 자신 있습니다. 중학생 패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닷새 동안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전쟁’을 말하는 글이 쏟아졌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평양궁만 초토화시키면 북한체제 바로 붕괴된다.” “여기까지 온 거 한번 밀어붙이자.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 “제발 괴뢰들아 폭격 한 번 해라. 평양 한복판에 미사일 날리면 전쟁 끝난다.”

남북 긴장상황이 극으로 치달으며 ‘전쟁불사론’이 확산되고 있다. 20~30대가 주도하는 인터넷 공간이 주무대다. 익명성이 부추긴 과격함 정도로 치부하기엔 빈도와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전쟁 한번 하자”는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일부 젊은층에선 이를 ‘애국심’으로 평가했다. 예비역 신모(25)씨는 24일 “나는 선뜻 전쟁터로 갈 용기가 없는데 ‘전쟁하자’고 말하는 건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멋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은 숭고하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그 비참함을 먼저 떠올렸다. 11세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는 김모(76)씨는 “군인들이 길가에서 대포를 몰고 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소나무 껍질 벗겨다 날로 먹으면서 하루하루 버티던 시절을 모르는 이들이 전쟁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사태 당시 육군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했던 한모(26)씨는 “전방에서 탱크가 움직이는 걸 눈으로 보니 진짜 전쟁이 나서 죽는구나 싶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불사론이 인터넷 공간에서 세(勢)를 형성하는 상황. 전문가들은 ‘철없는 이야기’로 넘기기엔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원인으로는 막막한 ‘현실의 벽’에 갇힌 청년층의 실태에 주목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전쟁을 거론하는 방식으로 왜곡·표출됐다는 것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현실의 무력감과 힘든 일상에 지친 젊은이들이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는 수단으로 전쟁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며 “애국심이 왜곡돼 집단적 공격성으로 발전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릇된 전쟁관이 사회에 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도 “전쟁이 나면 의무를 다하겠다는 건 국민으로서 당연한 태도지만 인터넷의 전쟁불사론 같은 극단적 견해는 경계해야 한다. 일상생활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손동영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SNS 특성상 전체의 의견보다는 한쪽 얘기가 증폭돼 나온다”며 “증폭된 얘기는 언제든 정치적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다. 결코 현재의 남북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사원 조모(27)씨는 “‘삼포세대’로 불리는 우리 또래가 사회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비군”이라며 “군대와 SNS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려는 슬픈 시도인 것 같다”고 했다.

심희정 김판 기자 simcity@kmib.co.kr 온라인 편집=김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