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소련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아동 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아이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무대장치일 뿐 그 사건이 일어났던 1950년대 스탈린 치하의 공산주의 소련 사회가 공포의 대상이다. 밤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잡아가는 비밀경찰이 판치고, 어느 날 갑자기 내 남편이, 아내가 스파이로 몰려 국가반역자의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거나 오지로 유형(流刑)당하는 사회. 암울한 절망과 궁핍만이 가득 찬 어두움이 잔뜩 드리워진 사회. 아이들이 수십명씩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이 일어나도 “(사회주의) 낙원에 살인은 있을 수 없다”는 독재자의 일갈에 살인사건이 사고사로 처리되고 아예 없던 일로 덮여지는 사회.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이 주는 공포의 본질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쇄살인사건 추적이라는 스릴러와 참혹한 압제사회 묘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어느 것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끝난다.
그럼에도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당국은 이 영화에 대단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즉 이 영화가 올 초 공개됐을 때 러시아 문화부는 상영을 반대했다. 그 결과 러시아와 일부 옛 소련권, 즉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위대한 애국전쟁(2차대전) 당시와 그 직후 시기 소련의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했으며, 특히 소련인민들의 이미지와 캐릭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나아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문화부장관은 개인 성명을 통해 이 영화가 “러시아인들을 신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간 이하로 묘사”했으며 러시아를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모르도르’처럼 보이게 했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오히려 영화가 원작의 공포 분위기를 살린 건가? 글쎄다.
하긴 원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공포영화는 부지기수다. 대표적인 게 공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들이다. 브라이언 디 팔마가 만든 ‘캐리(1976)’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 그리고 로브 라이너의 ‘미저리(1990)’ 정도를 제외하면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여타 영화들은 대체로 태작(馱作)이거나 기껏해야 범작(凡作)이다. 킹의 유려한 문장으로 엮인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그 으스스함과 무서움은 영화를 보면서 킥킥대는 웃음과 하품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반면 원작 소설 이상 가게 무서웠던 공포영화도 있다. ‘엑소시스트(1973)’. 영화가 발표될 무렵만 해도 재기 넘치던 젊은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이 만든 이 영화의 원작은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1971년에 내놓은 소설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가톨릭에서 쓰는 용어인 엑소시스트가 익숙하지 않아 ‘무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온 이 소설을 밤에 혼자 읽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화장실도 못 갔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런데 영화는 그보다 더 무서우면 무서웠지 못하지 않았다. 악령에 씌인 소녀로 분장한 린다 블레어라는 배우는 원래 얼굴이 어찌나 귀엽고 예뻤는지 악령분장이 더욱 무서웠다. 게다가 그 소름끼치는 악마의 목소리라니. 소녀의 귀신들린 악마 목소리 연기는 베테랑 여배우 머세데스 맥켐브리지가 맡았다. 그녀는 영화 ‘자이언트’에서 몰래 제임스 딘을 짝사랑한 록 허드슨의 누이로 나왔었다.
목소리 연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마이클 잭슨의 걸작 앨범 ‘드릴러’에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사악한 웃음소리가 삽입돼있다. 세상에 악마의 웃음소리가 있다면 바로 저것일 거라는 느낌이 절로 드는 이 기막힌 웃음소리의 임자는 바로 빈센트 프라이스.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단골 주연으로서 영국에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커싱이 있다면 미국에는 빈센트 프라이스가 있다고 할 공포영화의 대명사였다. 그가 출연한 공포영화는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1953년작 ‘납인형의 비밀(House of Wax)’은 컬트 반열에 드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단순히 무서움만 주는 게 아니고 상당히 진지하기도 했던 할리우드 고전 공포영화들에 비해 요즘 공포영화들은 대체로 공포(horror)가 목적이 아니고 피(gore)와 잔혹함, 혹은 괴기스러움이나 혐오감을 더욱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피가 튀기고(splash) 난도질하는(splatter)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은 누가 더 잔인하게, 누가 더 기발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거나(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 흡혈귀나 늑대인간에 이어 조지 로메로 이후 하나의 장르로 완전히 자리 잡은 좀비 영화들처럼 신체 훼손 및 식인 등 혐오감의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샤이닝’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진정한 공포영화가 그립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