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가 국내 출판·문학가를 강타하고 있을 때 기독교계 한쪽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직 신학교 교수들이 쓴 신학서적이 출처나 인용 표시 없이 외국 신학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는 지적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촉발된 이 비판은 하나의 신호탄이 됐고 이후 또 다른 저작들에 번지기 시작했다. 비판자들은 자신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라며 신학서적도 엄격한 연구윤리에 입각한 결과물이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신학·출판계에 불고 있는 신학서적 표절 논란이 태풍으로 변하고 있다. 태풍은 아직 이동경로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태풍이 그동안 관행을 몰아내는 ‘효자’ 태풍이 될지, 상처만 남길 ‘재앙’이 될지는 미지수다.
‘태풍의 눈’은 지난 2월 말 SNS 페이스북 그룹인 ‘번역이네 집’이라는 사이트에 한 독자가 국내 모 신학대 교수의 책이 영국 신학자의 내용과 겹친다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이 SNS는 주로 신학서적의 번역과 연관된 문제점을 토론하던 그룹이었다. 글이 올라오자 ‘우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댓글이 달리며 공론화됐다. 이후 SNS에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고 SNS의 폐쇄와 재개설 과정 등의 진통까지 겪으며 지난 5월 ‘신학서적 표절반대(신표)’ 그룹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6개월. 현재까지 신표에서 ‘검토’ 대상이 된 저자는 8명이었다. 이들은 해외 저작들을 아무런 출처 표시 없이 인용해 책을 출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대부분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간된 책이었다. 모두 성서신학(구약학, 신약학) 분야의 개론서나 강해서였다. 신학 전공자를 위한 책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비전공자들도 읽기가 가능한 저작이었다. 독자 여론은 싸늘했다. 몇 만원씩 주고 구입한 책이 외국 서적을 베낀 것이었다는 배신감이 폭발했다. 비난의 화살은 저자를 비롯해 출판사와 편집자들에게까지 날아갔다.
그 결과 지난달 말까지 저자 6명은 대부분 제기된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했고 해당 출판사들은 문제가 된 책에 대해 절판 처리했다. 일부 출판사는 교환이나 환불 등의 보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두 명의 신학 교수가 자신들은 표절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펼치고 있고, ‘신표’ 그룹에서는 “저자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출판사는 절판 조치하라”며 압박하고 있다. 해당 교수들과 신표 그룹 측은 서로 반론을 제기하며 공방을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이 교수들의 입장은 이렇다. A교수는 “표절이 아니라 새로운 주석의 장르”라고 답변했고, B교수는 “표절 기준으로 볼 때 표절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B교수는 지난달 같은 학교 전공 교수들이 나서서 표절 의혹을 조사하고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학술연구재단 연구윤리정보센터가 제공하고 있는 ‘표절의 정의와 종류’(서울교대 이인재 교수)에 따르면 표절은 연구자가 자신이 저작물 속에 타인의 저작물을 활용했으면서도 정직하게 그 활용 사실을 밝히지 않을 때, 즉 출처를 표시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표절은 ‘텍스트 표절’ ‘아이디어나 원저작물의 구조 표절’ ‘말 바꿔 쓰기(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 표절’ ‘모자이크 표절’ 등으로 분류한다.
텍스트 표절은 가장 흔한 유형이다. 원저자의 저작물에서 가져온 단어나 문장 문단 표 그래프 사진 등을 출처 표시 없이 그대로 베끼는 경우다. 구조 표절은 원저자의 독특한 사고 구조나 논리 전개틀을 무단으로 베끼는 것이다. 패러프레이징은 인용 표시 없이 타인의 저작물을 말을 바꿔 표기한 경우다. 학계에서는 타인의 저작물을 자신의 용어로 바꿔 쓰기 할 수는 있지만 원저작물에 대한 출처는 밝혀줘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모자이크 표절은 출처 없이 문장을 바꾸거나 편집, 변형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만드는 것을 말한다.
최근 표절 논란은 대상 저작물이 학술 논문이 아니라 모두 서적이 문제가 됐다는 점에서 논쟁의 양상은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다. 몇 몇 저자의 책은 교과서 수준의 부교재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학계의 관행상 출처나 인용은 전체가 아니라 핵심 문장만 표시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또 표절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표절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B교수는 처음에 인용을 적시했기에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이고 ‘신표’ 그룹은 인용을 했다면 모두 각주를 달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본적으로 표절은 저작물이 논문이냐 서적이냐를 떠나 윤리적이지 않은 학술적 글쓰기를 말한다. 2007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외국박사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연세대 김상근(연신원) 교수는 “논문이나 책 모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표현을 표절하는 것은 양심과 신앙에 어긋난다”며 “표절 문제는 정직성의 문제다. 교회와 신학계에서 정직성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핵심 가치”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을 바라보는 신학자들은 안타까움과 곤혹스러움이 겹치고 있다. 성서학계의 경우 참고해야 할 필수 서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 대해 인용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특정 주제를 다룬 대표적 저술을 참고할 때는 다양한 방식의 표절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구조라는 것이다. 또 외국 원서를 읽는 독자들이 증가하면서 쉽게 책을 쓸 수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번에 거론된 교수들이 그동안 학문적 기여를 해왔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는 분위기이다. 실제로 이들 교수의 논문이나 연구 실적은 탁월하다는 평이 많았다. 또 지나친 인신공격은 삼가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에 대해 ‘신표’ 그룹 운영자이자 최초 공론화를 촉발했던 이성하(원주가현침례교회) 목사는 “절대로 인신공격이 아니다. 우리는 책의 소비자이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학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것뿐이지 개인을 향한 공격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신표 그룹의 표절 기준은 비교적 단순하다. 저작물 내용에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것, 번역 수준으로 인용했으면서 출처 표시가 없는 것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운영자와 관리자는 제보를 받은 저작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이 목사는 “제보가 들어온다고 모두 검토 대상에 오르는 것은 아니며 명백히 잘못된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며 “추후 5~6명 학자들의 저작물에 대해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목사는 “지금은 성서신학 중심의 서적이지만 다른 전공 분야에 대한 책들도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수는 “독자 또는 비전문가에 의한 표절 판단은 매우 위험하다”며 “자칫 진영 논리에 휘말리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최고 전문가들에 의한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현재 ‘신표’ 그룹 회원은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21일 오전까지 2400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회원은 신학교 교수를 비롯해 목회자와 유학생, 신학생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번 논란을 긍정적으로 지켜보는 쪽에서는 독자 소비자운동이 시작됐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설교 표절 문제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비전문가들에 의한 표절 의혹 제기는 더 큰 혼란만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른바 ‘표절 사냥꾼’들이 난무할 수 있으며 혼란을 틈타 진짜로 걸러져야 할 저작들이 간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어람아카데미는 오는 27일 오후 7시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 4층 사회봉사관에서 ‘표절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포럼을 연다. ‘표절론’의 저자 남형두(연세대) 교수가 초청돼 기조발제를 맡으며 차정식(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가 ‘신학·학술 논문 표절의 현실과 개선방안’을, ‘신표 그룹’ 운영자 이성하 목사가 ‘표절의 양상과 대처방안’을, 서문강(중심교회) 목사가 ‘설교 표절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신학서적 표절 논란… ‘검토’ 대상 된 저자 무려 8명
입력 2015-08-23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