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한명숙(71) 의원과 검찰의 악연은 2009년 12월 시작됐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 비자금 사건에서 한 의원 이름이 나왔다. 한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 5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하 5만 달러 사건)이 불거졌다. 야당은 명운을 걸고 맞섰다. 검찰은 한 의원이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서도 불법 자금 9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하 9억원 사건)을 별도로 수사하는 강수를 뒀다.
5만 달러 사건에서 내리 무죄가 선고된 한 의원은 검찰의 ‘2차 공격’인 9억원 사건 항소심에서 덜미를 잡혔다. 2011년 10월 9억원 사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될 때 ‘청렴’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기자들 앞에 섰던 한 의원은 20일 상고심 법정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반전은 ‘4(무죄)대 0(유죄)’ 완승이었는데…=한 의원과 검찰은 수사 초기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곽 전 사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 5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한 의원은 “단돈 1원도 받은 일이 없다”고 응수했다. 세 차례 소환 통보에 모두 불응했다. 검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전직 총리를 강제 구인하는 초강수를 뒀다. 한 의원은 “법정에서 말하겠다”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는 2009년 12월 22일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에서도 검사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5만 달러 사건에 잇달아 무죄가 선고되며 한 의원은 ‘청렴의 아이콘’으로 부각됐다. 2013년 3월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하자 승기를 잡았다. 동료 의원과 지지자들은 선고 때마다 백합을 들고 무죄를 자축했다. 한 의원은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오세훈 전 시장과 박빙 경쟁을 펼쳤다.
검찰은 전직 총리를 상대로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5만 달러 사건의 1심 선고 전날 9억원 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해 ‘정치검찰’이라는 오명도 얻었다. 서울시장 선거를 앞둔 상황인 데다 5만 달러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전이어서 야당 후보 흠집 내기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9억원 사건마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검찰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연장전’에서 드러난 ‘백합’의 실체=9억원 사건의 항소심 심리에서 반전이 시작됐다. 2011년 10월 1심 무죄 선고 이후 1년5개월간 재판이 진행되지 않다가 5만 달러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2013년 3월부터 항소심이 진행됐다.
1심과 달리 서울고법 형사6부는 한만호 전 대표의 검찰 조사 당시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2007년 3~9월 9억원을 3억원씩 나눠 한 의원에게 전달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진술했었다. 비록 법정에서 말을 바꿨지만 한만호 전 대표 명의의 자기앞수표 1억원을 한 의원 동생이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정황 등을 봤을 때 애초 진술이 진실에 부합한다고 본 것이다. 심리 6개월 만에 징역 2년, 추징금 8억8000만원을 선고했다. 다만 현역 국회의원인 점, 1심과 결론이 달라진 점 등을 들어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대법원 확정 판결로 한 의원은 일단 서울구치소에 수감된다. 전직 총리로는 처음이다. 검찰은 21일 오후 2시까지 서울중앙지검 또는 서울구치소로 오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한 전 총리 측은 “고령이어서 병원 일정 등으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해 검찰과 조율하고 있다”며 “출두 날짜가 내일(21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의원은 출두하면 곧바로 입감 절차를 밟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가 수형자 분류 작업을 거쳐 교도소로 옮겨 복역하게 된다.
◇사라진 ‘백합’=이날 대법원 대법정에는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등 야당 의원 20여명이 참석했다. 한 의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1심 선고 때 법원에 몰려왔던 지지자 200여명과 그들이 들고 있던 ‘백합’ 역시 자취를 감췄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주문을 읽고 퇴장하자 의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법정을 나섰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한명숙과 검찰의 악연… 뒤늦게 드러난 ‘백합’의 실체
입력 2015-08-20 2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