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에 있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물을 지어주십시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조선·영국·일본인이 함께 어울려 예배하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십시오. 교회 건물이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되 한국교회 건축의 모범이 되게 해 주십시오.”
대한성공회 제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1862~1930)가 1917년 영국 왕립건축협회 소속 건축가 아서 딕슨에게 서울 중구 세종대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건립을 의뢰하면서 당부한 이야기다.
딕슨은 트롤로프 주교의 당부를 설계에 충분히 반영했다. 그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로 성당을 짓되 지붕에 전통기와를 얹고 전통 창호 모양으로 창을 꾸몄다. 예배당 안에는 제단을 3곳에 놓아 조선인과 영국인, 일본인이 각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성당은 설계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일제의 무리한 공출 요구 탓에 건축 자재를 제대로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래보다 축소된 형태로 1926년 건립됐다가 70년이 지난 96년에야 원래 설계대로 완공됐다.
하지만 완공 후에도 자태를 제대로 뽐내지 못했다. ‘이 땅의, 이 백성을 위한 선교의 중심지’란 선교적 의미가 담긴 데다 동·서양 건축기법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건축물이었지만 일제가 1937년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로 지은 옛 서울국세청 남대문별관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성공회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성을 회복하기 위해 97년부터 정부와 서울시에 별관 철거를 건의해왔다. 2008년 국가상징거리 조성 1단계 사업에 포함돼 건물 철거가 검토됐지만 실현되지 못하다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세종대로 일대 역사문화특화공간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철거가 확정됐다. 지난 5월부터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해 현재 일부 벽면과 기둥만 남겨둔 채 철거가 마무리됐다. 78년 만에 세종대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시는 철거된 건물의 지상·지하 공간을 포함해 덕수궁과 서울시청, 서울광장, 세종대로 지하를 아우르는 마스터플랜 설계를 공모 중이다. 이곳이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의 사당 ‘덕안궁’이 있던 터라는 점을 고려해 11월쯤 문화재 발굴조사도 실시한다.
대한성공회는 성당을 시민에게 개방하고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지를 공원으로 꾸밀 수 있게 했다. 1088㎡(330평)에 이르는 별관 터에 주차장 부지 893㎡(270평)이 합쳐지면 더 넒은 공원을 시민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한성공회 김한승 신부는 “성당이 정신적·육체적 쉼터가 되도록 시민들을 위한 영성 프로그램과 문화공연을 기획하고 있다”며 “이번 일이 성공회뿐 아니라 전체 한국교회가 100여년 전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복음화의 소임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78년 만에 세종대로에 모습 드러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입력 2015-08-20 2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