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영화 자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스트우드가 영화에 이건 내 작품이오 하고 드러내듯 ‘낙관(落款)’을 찍었다는 사실. 영화를 주의 깊게 본 관객이라면 알아차렸겠지만 영화 중간에 이스트우드가 젊은 시절 출연한 흑백 TV 서부극시리즈 ‘로하이드’의 한 장면이 스치듯 삽입돼있었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프랭키 밸리와 포시즌스가 스타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던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때 극중 인물이 TV를 보는 장면에서 당시 미국에서 방영되던 ‘로하이드’와 풋내 나는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흑백 TV 화면에 나온 모습으로 영화 화면에 비친 것. ‘로하이드’는 미국에서 1959년부터 1965년까지 방영된 서부극으로 그 이전까지 완전 무명이던 이스트우드가 거의 주연급의 다혈질 카우보이로 출연해 이름과 얼굴을 미국 관객들에게 알리게 된 ‘처녀작’이었다. 국내에서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는데 “rollin' rollin; rollin'”으로 시작하는, 프랭키 레인이 부른 주제곡도 대단히 유명했다.
이스트우드는 2014년 미국에서 이 영화가 공개됐을 때 TV극 ‘로하이드’를 통해 자신이 저지 보이스에 ‘출연’한 것을 놓고 “히치콕을 흉내 낸 것”이라고 털어놨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영화에 반드시 한 컷씩 등장함으로써 ‘낙관을 찍은’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 앨프리드 히치콕이다. 그의 영화들을 보면 그는 개를 끌고 지나가는 행인이라든지 버스 승객 등 아주 일상적이고 흔한 모습으로 한 장면씩 얼굴을 비치는 것으로 유명한데 관객 입장에서는 “저 영감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영화에 등장할까‘를 찾아보는 것도 히치콕 영화를 보는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히치콕의 작품 중에 1944년에 만들어진 ‘구명선(Lifeboat)'이라는 게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배가 침몰하자 조그만 구명보트에 몸을 싣고 바다를 표류하는 7인의 승객을 다룬 영화였다. 영화가 시종 이 작은 보트를 무대로 진행되다 보니 자기 영화에는 반드시 한 컷 씩 등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히치콕 영감이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얼굴을 내밀지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히치콕이라도 영화내용이 그렇고 보면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치콕은 이 작품에서도 관행을 지켰다. 히치콕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못 본 이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이미 나온 지 한참 된 영화니까 해답을 말해본다. 그는 보트에 굴러다니는 신문지의 광고 사진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히치콕처럼 직접 얼굴을 비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낙관을 찍는 감독들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경우 자신의 다른 영화와 관련된 아이템들을 쓰곤 한다. 이를테면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2편인 ‘마궁의 사원(Temple of the Doom)’에는 중국 상하이의 클럽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오비완’이다. 다 알다시피 오비완은 그의 또 다른 히트작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다이 기사 ‘오비완 케노비’다. 젊은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의 스승. 이런 일종의 ‘장난’같은 낙관 찍기는 인디애나 존스 1편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에도 이미 나타나있다. 즉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비행기의 동체에 OB-CPO라는 문자가 씌어있는데 그것이 ‘오비완’ 그리고 역시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못 3CPO를 의미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 ‘낙관’은 명장 스탠리 큐브릭도 사용했다. 그는 스티븐 킹 원작의 공포영화 ‘샤이닝’을 만들면서 자신의 또 다른 명작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상기하게 하는 소품을 슬쩍 집어넣었다. 잭 니콜슨이 죽이려 한 아들 대니가 입고 있는 스웨터다. 거기엔 로켓 그림과 2001이란 숫자가 씌어있다. 물론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다.
그런가 하면 스파게티 웨스턴의 비조(鼻祖) 세르지오 레오네는 또 다른 방식의 낙관을 찍곤 했다. 극단적인 클로즈업 숏이다. 각종 물품은 물론이고 특히 찌푸린 눈이라든가 음식을 가득 넣고 씹는 입, 총을 잡으려 움찔대는 손 등 신체의 한 부분이나 얼굴 전체를 화면이 터져나갈 듯이 끌어당겨 찍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대체 왜 저기서 저토록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시도했을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그는 클로즈업 기법을 ‘남용’했는데 결국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낙관이 된 셈이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