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전범 “위안부 없는 곳이 없었다”…이용요금 50전

입력 2015-08-03 10:18 수정 2015-08-03 10:49
연합뉴스TV 유튜브 캡처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군무원으로 일했던 조선인 전범의 증언 영상이 공개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 22주년인 4일을 앞두고 싱가포르에서 B·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던 송복섭(1916년생·작고)씨의 1990년대 초 인터뷰 영상 일부를 3일 공개했다.

송씨는 1992년 언론에 자신이 있던 부대에서 운영된 조선인 위안부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영상에서 목격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을 증언했으며,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가 자신이 돌봐줬던 영국군 포로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일화 등을 공개했다.

유족회에 따르면 송씨는 1940년대 초 강제징용을 피하려 일본군 군무원으로 입대해 인도네시아에서 포로감시원과 보급병 등으로 일했다.

송씨는 1992년 한 지역 일간지에 자신이 일제 패망 후 수마트라에 만들어진 조선인 자치조직 '조선인회' 간부로 있을 때 인원을 파악하려고 적어뒀던 61명의 여성 명부를 공개하면서 이들이 모두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했었다.

송씨는 영상에서 "당시 팔렘방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들은 '제1명월관'과 '제2명월관' 두 곳에 나뉘어 있었고, 수마트라든 싱가포르든 인근에 조선인 위안부가 없는 곳이 없었다"고 폭로했다.

군인들은 명월관을 이용하며 50전을 치렀고, 문 앞에도 '한발(一發)에 50전'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명월관의 위안부 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명월관 운영자는 한국인 형제로, 일본군에 협조해 위안부를 관리하며 비호받는 '끄나풀'이었다고도 말했다.

송씨는 이들 형제는 일본 패망 후 조선인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고 들었다.

종전 후 위안부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송씨가 자치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연합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송씨는 1945년 일본 패망 후 수마트라섬 팔렘방 지역에 꾸려진 자치조직인 '조선인회'의 감찰 역할을 맡았다가 1946년 2월 연합군에 체포됐고 같은 해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결국 1947년 5월이 돼서야 일본 사세보(佐世保)로 옮겨와 그곳에서 부산을 거쳐 고향인 전남으로 돌아왔다.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