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유엔군 참전용사들, 62년 만에 북한군과 마주하다

입력 2015-07-28 17:50

28일 오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당시 총구를 겨눴던 북녘 땅을 60여년 만에 다시 마주했다.

이곳엔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무장한 남북한 군인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참전용사들은 조용히 북쪽을 응시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옛 전우들과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6·25전쟁 참전용사 마티네즈 헨너리(85·미국)씨는 “피와 땀을 흘리며 싸웠기에 항상 한국 땅을 그리며 살아왔다”면서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이 나라를 다시 찾아 행복하다”고 감격해했다. 헨너리씨는 6·25전쟁 발발 1주일 뒤인 1950년 7월 초 부산에 도착했다. 1년간 한국에 주둔했다는 그는 “적군과 육박전을 벌이던 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그때 포화 속에 스러져간 수많은 전우들의 피가 이 나라를 지킨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전쟁 중에 다쳐 아직도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데이비드 벨라스코(70·미국)씨는 6·25전쟁 때 실종된 형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벨라스코씨는 이날 실종된 형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왔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형은 내게 ‘SGT Frank A Velasco USA 02 DEC 50, Korea’라고 쓰인 반지를 건넨 뒤 한국으로 떠났고 북한 땅까지 진격했다고 들었다”며 “지금 형이 살아있다면 85세일 것이다. 자상한 형이 이 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다. 무덤이라도 찾아 달라”면서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참전용사들은 이날 판문점의 도끼만행 사건 현장과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도라전망대 등을 돌아보며 남북분단의 현실을 체감했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6·25전쟁 당시 10만명의 피란민을 흥남에서 구출한 미 해병대 에드워드 H 포니 대령의 증손자인 벤저민 에드워드 포니(29)씨가 판문점 방문행사의 길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포니씨는 아버지로부터 증조부와 흥남철수 작전 등에 대해 전해 듣고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2009년 한국에 들어와 목포 영흥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흥남철수작전으로 생명을 구한 피란민의 후손을 만나왔다. 지난해에는 한국전쟁기념재단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입학해 한·미동맹과 동아시아 평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포니씨는 “전쟁의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증조할아버지의 소명을 잇기 위해 한국에서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장래 희망은 주한 미국대사다.

판문점을 찾은 80대 노병과 가족 등 40여명은 지난 25일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 초청으로 입국했다. 소 목사는 올해로 9년째 6월 25일을 전후해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한국에 초청하고 있다. 소 목사가 해외 참전용사 초청을 결심한 것은 2006년 7월 미국 백악관 신우회 회원과 경제인들에게 설교했을 때의 일이 계기가 됐다. 설교가 끝나자 “목사님, 한국은 왜 반미감정이 높은 겁니까. 성조기는 왜 찢고요. 미국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는 질문이 나왔다. 당황한 소 목사는 “미국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인 대부분은 미국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소 목사는 2007년부터 참전용사 초청 행사를 시작했고 매년 감사예배를 열어 한·미 우호 증진과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이들 참전용사는 30일까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과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와 천안함 전시시설 등을 방문한다. 판문점=

판문점=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