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 했던가. 일제의 폭정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이 벅찬 소식을 알리기 위해 날듯이 달려가는 두 여성. 이미 참혹하게 죽은 시체,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광복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기운찬 의지가 느껴진다.
해방 공간의 감격을 길이 2m가 넘는 대형 화폭에 수십 명이 뒤엉킨 인물 군상으로 표현한 월북 작가 이쾌대(1913∼1965)의 ‘군상-해방고지(解放告知)’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전시된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그의 타계 50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을 22일 개막한다.
이쾌대의 군상 시리즈는 40세에 월북하기 전 30대의 청·장년기에 그린 것이다. 화면에 기운이 넘치고 30대의 것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량 면에서도 탁월하다. 장기인 인체 데생은 완벽에 가깝고 그가 추구해온 한국적 인물화의 특성도 잘 혼합돼 있다. 지금까지의 전시는 리얼리즘의 대가로만 접근해왔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그가 ‘한국적 서양화’를 치열하게 모색해온 점을 부각시켰다.
경북 칠곡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초기부터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휘문고보 졸업반 때 결혼해 유학시절을 함께 보낸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다양한 인물화를 실험했다. ‘카드놀이를 하는 부부’에서 보듯 그의 화폭에서 여성은 자의식이 강하고 능동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 게 특징이다.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던 그는 전통 초상화에서 답을 찾은 듯하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1938년부터 그린 인물화에서는 옛 초상화처럼 의상에 검은 선묘가 나타난다. 유화 물감을 긁어냄으로써 서양화가 주는 기름진 느낌을 빼고 담백한 맛을 살린다. 그런 한국적 초상화의 절정이 1940년대 제작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쾌대는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북한군의 선전미술제작에 가담하게 되었고 수복 후 국군에 체포됐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했다. 아내와 1녀 3남을 둔, 행복했던 가장이 선택한 행보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면이 많다.
한국미술사에서 잊혀졌던 그는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후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이후 몇 차례 전시가 있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유족이 비공개로 소장하고 있던 드로잉 150여점과 잡지 표지화, 삽화 등이 함께 소개됐다. 17살 때 그린 수채화부터 월북직전 포로수용소에서 남긴 드로잉까지 이쾌대 예술의 전개와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품이 오롯이 보존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순애보 덕분이다. 엄혹한 반공정권 하에서 남편 그림을 자식들도 모르게 다락방의 비밀공간에 숨겨 놓았다. 액자는 떼 내고 캔버스 천만 신문지에 말아서 보관했다. 이로 인해 일부 그림은 유화 물감의 박락이 심해 복원과정을 거쳐야했다. 세월이 바뀌어 다락방 그림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지만 유갑봉이 1980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쾌대가 해방공간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차렸던 서울 성북동의 ‘성북회화연구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도 이번에 나왔다. 이곳은 군상 시리즈가 탄생한 공간이기도 하다. 관람료는 무료고 전시는 11월 1일까지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한국적 서양화를 개척한 이쾌대… 장쾌한 해방 대서사
입력 2015-07-21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