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19일(현지시간) 미군 포로들에게 공식 사과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최초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2차 대전 당시 강제 노역했던 타국 피해자들에게 여러 차례 사과와 배상을 했던 지멘스 등 독일 전범기업들과 달리 일본 전범기업들은 ‘모르쇠’와 소송으로만 일관해왔다. 이 때문에 사과 자체가 과거에 비해 진일보했다는 평가와 함께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사과가 종전 70주년을 맞는 올해 미쓰이 그룹 등 다른 일본 전범 기업들의 사과로 이어질지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국 BBC방송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도 이 소식을 비중 있게 전했다.
미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의 사과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2차 대전 당시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전신인 미쓰비시 광업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강제로 일했던 제임스 머피(94)씨는 “전쟁이 끝난 뒤 지금까지 일본 기업에 사과만이라도 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면서 “이제 일본과 더 좋은 관계를 쌓고 우정을 돈독히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시몬 비젠탈 센터의 부소장이자 랍비인 에이브러햄 쿠퍼는 “오늘 이 자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전쟁포로 피해자 가족이자 ‘바탄·코레히도전투 미국수호자기념연합회장’인 잰 톰슨 교수도 “미쓰비시의 사과는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는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다른 일본 대기업들의 사과도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반도나 중국 등 다른 지역 출신 피해자는 배제한 채 사과의 대상이 미군 포로에게만 한정됐다는 점에서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특히 사과의 대상이 미국에만 한정돼 있다는 점은 지난 4월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 의회 연설에서 한국 등 주변국에 대해 분명한 사과 없이 미국에만 고개를 숙였던 것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베 총리는 당시 연설에서 2차 대전 당시 상대국이었던 미국에 대해 이례적으로 “깊은 회개(deep repentance)” “깊은 경의와 함께 영원한 애도를 보낸다” 등의 표현을 사용한 반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고만 표현했다. 일본 정부는 앞서 2009년과 2010년에도 미국인 포로 징용 문제에 대해서만 공식 사과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사과가 아베 총리가 다음 달 발표할 종전 70주년 담화(일명 아베 담화)를 앞두고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관제 사과’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오카모토 유키오 미쓰비시 머티리얼 사외이사가 아베 담화 내용을 논의하기 위한 ‘21세기 구상 간담회’ 위원이란 점도 이런 의혹을 뒷받침한다. 일본 정부의 과거사 부정과 집단 자위권법 강행 등으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데 대한 물타기용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기무라 히카루 미쓰비시 머티리얼 상무는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사과 대상에서 빠진 데 대해 “일부러 뺀 것은 아니다”며 “현재 2차 대전 당시 강제징용과 관련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의견을 밝히지 않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장차 다른 나라 징용자들에 대해서도 사과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만 덧붙였다. 앞서 오타카 마사토 주미 일본대사관 대변인은 “이번 사과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견해이며 일본 정부는 관여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미쓰비시, 한국 중국 등 배제해 사과의 진정성 논란
입력 2015-07-20 16:46 수정 2015-07-20 1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