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웅 김성균 등 몇몇 배우가 악역을 멋지게 소화해내면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나라 배우 중 악역이라면 생각나는 이는 단연 고 이예춘, 허장강 선생이다. 요즘 어떤 배우가 악역으로 뜨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두 위대한 배우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많은 관객들이 배우와 영화 속 캐릭터를 동일시하던 ‘순진무구의 시대’ 워낙 실감나는 악당 연기로 마치 진짜 악한이기라도 한 듯 욕도 많이 얻어먹었던 두 사람처럼 국내외적으로 이른바 악역 전문 배우들이 존재한다.
떠도는 각종 영화 관련 리스트 가운데 ‘역대 최고의 악역’이라든지 ‘악역배우 목록’ 같은 것이 있지만 대개는 악역 전문이라기보다 어쩌다 한두 번 연기한 악역이 워낙 눈에 띈 경우가 더 많다. 이를테면 ‘양들의 침묵’에서 식인 의사 한니발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앤소니 홉킨스나 불세출의 영화 속 악당으로 꼽히는 ‘암흑기사 배트맨’의 조커 히스 레저, ‘레옹’의 광기에 찬 부패 형사 게리 올드먼 같은 경우 영화사에 남을 만한 멋진 악역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악역 전문배우라고는 할 수 없다. 수많은 필모그래피 가운데 어쩌다 악역을 연기한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을 뿐.
그러나 거의 모든 연기 인생을 통틀어 간단없이 악역을 맡아온 악역 전문배우들은 분명히 있다.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으면 안타고니스트가 없을 수 없고,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 캐릭터 등에서 이 분야에 특화된 배우가 있기 때문이다.
악역 전문배우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피터 로레다. 국내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악역 전문으로 유명했다. 헝가리 출신으로 독일에서 배우 경력을 시작한 그는 프리츠 랑 감독의 초기 걸작 ‘M(1931)’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명성을 떨쳤고 할리우드로 건너와서도 계속해서 범죄자 등 악당역을 맡았다. 험프리 보가트와 공연한 ‘말타의 매’ ‘카사블랑카’ 등이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이다.
서부 최고의 건맨 셰인에 맞섰다가 최후를 맞는 악당역의 잭 팰런스도 악역 전문배우로 꼽힌다. 검은 색 일색의 복장을 하고 히죽대는 고용 총잡이 잭 윌슨으로 나와 정의의 떠돌이 셰인과 대결을 펼치는 팰런스는 이 역할로 ‘악역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팰런스는 튀어나온 광대뼈에 움푹 들어간 눈 등 이국적이고 일그러져 보이는 마스크로 인해 악역을 많이 했을 뿐 엄밀히 말하면 악역전문이라기보다 다양한 인물을 망라한 성격배우라는 편이 옳다. 이를테면 리 마빈과 함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처량한 카우보이로 나와 잡화점 주인으로 변신을 꾀하다 풋내기 무법자의 총에 맞아 죽는 연기를 보여준 이색 서부극 ‘몬테 월쉬’에서 팰런스의 이례적인 선인 역할은, 영화의 주제를 가슴 절절하게 담아낸 마마 캐스의 주제곡 ‘The Good Times Are Comming'과 함께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또 그에게 늘그막(73세)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굿바이 뉴욕 굿모닝 내사랑(City Slickers)'의 카우보이 컬리 역할은 어떤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밖에 당초 악역 전문배우로 딱지가 붙여졌다가 인기를 얻으면서 선인 주인공으로 변신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위드마크다. 데뷔작인 1947년작 ‘죽음의 키스’에서 냉혈한 살인자로 나와 소름 끼치는 웃음과 함께 보여준 냉혹한 악당 연기로 대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골든글로브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당연히 이후 악역 요청이 줄을 이었고 그는 많은 필름 느와르에서 악당과 살인자를 연기했다. 그러다가 인기가 상승하면서 점점 선한 역으로 갈아타기 시작해 서부극 사극 현대극 등에서 때로는 영웅적이고 때로는 로맨틱한 선인 주인공으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그런 후년의 대표적인 역할이 ‘형사 마디간’이었다.
이 같은 위드마크의 사례는 나중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마초 중의 마초 리 마빈과 악당역의 달인 어네스트 보그나인, 그리고 액션배우로 한때를 풍미한 찰스 브론슨에게도 해당된다. 마빈과 보그나인은 결코 선인으로 보이지 않는 우락부락하고 울퉁불퉁한 외모 탓에 영화경력 초기에 맡아 놓고 악역을 연기했으나 마빈은 코믹한 역할(영화 ‘캣 벌루’)로, 보그나인은 순진한 노총각 역할(영화 ‘마티’)로 각각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선한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브론슨 역시 풋내기 배우시절 찰스 부친스키라는 이름으로 인디언, 무법자, 갱스터 등 악역을 많이 했으나 나중에 찰스 브론슨으로 개명하고 콧수염을 기르면서 영웅적인 액션 주인공으로 거듭 났다.
이탈리아 서부극, 곧 스파게티 웨스턴을 통해 악역전문배우로 우뚝 선 이들도 있었다. 리 밴 클리프와 클라우스 킨스키. 두 사람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얼굴 생김새부터가 악역 전문처럼 보였거니와 애당초 ‘하이눈’ 등 정통 서부극에서 조무래기 악당역을 많이 해온 밴 클리프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통해 악당과 영웅적인 주인공을 모두 아우르는 묘한 경력을 만들어나갔고, 독일 출신 킨스키는 스파게티 웨스턴과 유럽산 전쟁물에서 악당 총잡이, 나치군 장교 등 계속 악역을 맡은데 더해 나중에는 같은 나라 출신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과 손잡고 ‘아귀레, 신의 분노’ ‘피츠카랄도’ 등의 영화에서 적역(適役)이라 할, 광기에 찬 역할을 맡아 성격배우로서 연기 영역을 넓혀나갔다.
서부극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정통 할리우드 서부극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악역을 도맡다시피 한 배우들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아 영화광이 아니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잭 일램(Jack Elam)과 슬림 피큰스(Slim Pickens)가 그들이다. 일램은 송충이 같은 눈썹에 사팔뜨기 눈, 사이가 벌어진 치아 등 험상궂은 모습으로 누가 봐도 나 악당이오 라고 이마에 써붙여놓은 것 같은 얼굴생김이 특징이었는데 세르지오 레오네가 찰스 브론슨을 기용해 만든 ‘웨스턴(Once Upon a Time in the West)'에서 영화 첫 장면에 나와 브론슨의 총에 맞아 죽는 3명의 건맨 중 하나로 유명하다. 또 원래 로데오 선수 출신인 피큰스는 그 경력을 살려 수많은 서부극에서 악당역을 해왔는데 다소 코믹하게 생긴 얼굴 덕분에 코믹한 역할도 많이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블랙 코미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였다. 이 영화에서 피큰스는 전쟁광 B-52 폭격기 조종사로 나와 수소폭탄을 소련에 투하하면서 마치 말에 올라타고 로데오를 하는 카우보이처럼 핵폭탄에 올라탄 채 카우보이 모자를 손에 쥐고 흔들면서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을 난다.
배우라면 누구나 영웅적인 선한 주인공을 꿈꾸기 마련이다. 하지만 ‘훌륭한 악당’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영웅 주인공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악역은 주인공보다 중요할 수 있다. 치고받는 권격 액션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때리는 주인공보다 맞고 멋지게 나가떨어지는 악역 배우이듯. 악역전문배우 만세다.
김상온 (프리랜서·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29.악역전문배우의 중요성
입력 2015-07-21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