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박희순(13)양과 초등학교 5학년 이재희(11)양은 머리를 맞대고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하지 무하마드 수카르노를 소개하는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이름, 활동시기, 가족관계 등 인물정보와 함께 업적, 일화, 명언을 각각 종이에 인도네시아어로 또박또박 적었다. 색색의 펜으로 내용에 걸맞은 그림도 그려 넣었다. 명언을 소개하는 말풍선에는 ‘꿈을 하늘 높이 걸어라’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가 큼직하게 들어갔다. ‘(그러면) 떨어지더라도 너는 별들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말로 이어지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격언이었다.
이 수업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다른 나라 출신인 학생들이 제2 모국의 위인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박양과 이양에게는 인도네시아가 제2의 모국이다. 각자 어머니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가족간 ‘소통의 문’ 열려
18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건물에서 ‘LG와 함께하는 사랑의 다문화 학교’ 언어인재 양성과정 3기 7월 캠프가 열렸다. LG그룹 후원으로 2010년 시작한 이 과정은 이중언어에 재능이 있는 다문화가정 학생을 뽑아 2년간 제2 모국어와 그 나라 문화를 배울 수 있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외대 교수진과 학생들이 교육과 지도를 맡고 있다.
이양은 “교육에 참여하기 전에는 ‘불 꺼’ ‘불 켜’처럼 간단한 말만 알아듣는 수준이었다”며 “요즘은 엄마랑 인도네시아어로 대화하면서 강아지를 키우게 해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박양도 “전에는 인도네시아어로 숫자 정도만 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계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만나면 좀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들 3기생은 지난해 3월부터 교육을 받았다. 중국어 9명, 일본어 8명, 몽골어 6명, 베트남어·인도네시아어 각 4명 등 31명이다. 언어별로 학생 수준에 따라 2개 반을 운영한다. 지난해보다 한 학년씩 높아진 학생들은 지금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3학년이다. 서울과 경기·인천 외에도 충남 천안과 충북 음성, 전북 순창, 전남 목포, 대구, 경북 안동 등 각지에서 선발됐다.
목포에서 이른 새벽 KTX를 타고 올라온 중학교 3학년 김승민(15)군은 어머니가 일본 시가현 출신이다. 어머니는 한국말을 잘한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었다는 김군은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LG다문화학교에 지원했다.
김군은 “여름방학 때마다 일본에 가는데 외할머니랑 대화하려면 엄마를 거쳐서 통역을 해야 했다. 외할머니와 직접 얘기해보고 싶어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기특하다”며 반겼다고 한다. 요즘 김군은 어머니와 하루 30분 정도 일본어로만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다문화는 경쟁력이다
인천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김준석(11)군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가면 제2 외국어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기왕이면 엄마의 말(몽골어)을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군은 “나중에 평범한 직업을 갖더라도 이 몽골어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군은 지난 1월 혼자 비행기를 타고 몽골의 외가에 다녀왔다. 외할머니 집에 묵으면서 여기저기 다녔다고 한다. 김군은 “엄마한테 몽골말을 조금씩 배우긴 했어도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처럼 기초적인 말만 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현지에 가면 혼자서도 길을 찾아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서정민(13)군은 “여기에 참여하면 엄마랑 말하기도 수월할 거 같고, 나중에 직장을 갖거나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어머니가 베트남 출신인 서군은 커서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를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군도 올해 1월 외가가 있는 베트남 호치민으로 연수를 갔었다. LG다문화학교 언어인재 양성과정은 매년 한 차례씩 해당 국가 주요 대학으로 8박9일간 해외연수를 떠난다. 당시 서군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숙소로 찾아와 외손자를 만났다.
올해 베트남어반은 다음 달 9일부터 하노이 인문사회과학대학에서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서군은 “이번에 가면 시장 같은 곳에서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물건을 사보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몽골어반은 오는 26일 각각 해외연수에 나선다. 일본·인도네시아어반의 연수는 내년 1월로 예정돼 있다.
아이가 달라졌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이날 캠프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회화 수업, 문화·위인 학습, 기말고사, 학부모 간담회, 해외연수 사전설명 순으로 진행됐다. 남편과 함께 학부모 간담회에 참석한 하라 나오코(42·여)씨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간단한 일본말을 하기는 했는데 여기 와서 공부하면서 존댓말, 예쁜 말을 쓰게 됐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남편 박재용(48)씨는 “배경(다문화가정)이 비슷한 친구를 많이 사귀면서 사회성도 좋아졌다”고 했다.
이들 부부는 중1인 큰딸(13)이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하라씨는 “다문화가정 친구들이 아무래도 외국에 대한 관심이 높다. 여기 와서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가진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그런 부분이 채워지는 듯하다”고 말했다. 요코하마 출신인 하라씨는 1999년 한국어를 배우러 유학을 왔다가 남편 박씨를 만나 결혼했다. 다음주에는 두 딸을 데리고 요코하마에 갈 계획이다.
하라씨는 기자가 말을 걸기 전 일본어로 작은딸(10)도 이 교육에 참가시키고 싶다는 이야기를 다른 학부모 구와하라 사치에(41·여)씨와 나누고 있었다. 구와하라씨도 1남3녀 중 첫째인 큰딸(13)이 이중언어 교육을 받고 있다. 구와하라씨는 일본 오사카 출신이다. 현지에서 만난 남편과 3년간 연애하다 2001년 한국에 와서 결혼했다고 한다.
그는 큰딸이 교육에 참가한 뒤로 둘째인 아들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아들은 놀림 받을까 봐 엄마가 일본 쪽이라는 걸 숨기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누나가 여기 참가하는 걸 보면서 지금은 자기도 하고 싶어 해요. 자부심을 느끼고 ‘(다문화가정을 배경으로 가진 게) 좋은 점이 있구나. 나도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2배의 가능성
한국외대 다문화교육원 연구원인 박종대(33) LG다문화학교 팀장은 “이중언어 교육이 언어 습득뿐 아니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경우가 많다. 다문화가 상당한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이 교육의 성과”라고 말했다.
중국어 전공자인 박 팀장은 2011년 5월부터 LG다문화학교에 참여했다. 그는 “2기였던 한 학생은 ‘게임으로 치면 나는 목숨이 2개’라고 하더라. 남들보다 2배의 가능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있다”고 전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게임으로 치면 전 목숨이 두 개죠” 가능성 두 배 다문화 아이들
입력 2015-07-20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