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옛날 영화는 요즘 영화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아니 크다. 자본력과 기술력 등 불가피한 시대적 ‘발전’에 따른 변화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그렇다. 무엇보다 영화의 속도감에서 그 차이는 두드러진다. 요즘 영화는 자칫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했다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라잡기도 힘든 경우가 많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도 도대체 왜 저게 저렇게 되는지, 왜 장면이 이렇게 바뀌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 일쑤다. 어쩌면 굳은 머리 탓일지도 모르지만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류가 영화에 침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비하면 옛날 영화의 그 단순함과 유장(悠長)함이라니. 물론 옛날 영화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는 중간에 잠깐 ‘볼 일’을 보고와도 영화를 즐기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때로는 너무 설명조라 지루하고 넌더리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만큼 친근하고 정겹다.
대표적인 영화 장르라 할 활극(요즘말로 액션)의 예를 보자. 요즘 액션영화의 대세인 ‘무슨 무슨 맨’ 같은 이른바 슈퍼히어로물은 눈이 핑핑 돌아가는 현란한 움직임을 쫓아가기도 힘들거니와 도대체 활극이 펼쳐질 필연적인 이유부터가 분명치 않다. 단순히 악당들이 있으니 싸운다는 식인데 악당들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는 무엇일까. 어쨌든 주인공 영웅들의 눈부신, 초인적인 활약이 거듭되다보니 지겨워졌는지 이제는 영웅 주인공의 악한 면이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정의의 사자‘로 충분한 배트맨이 ’암흑의 기사(dark knight)‘로 묘사되는 따위다. 말하자면 활극의 기본이라 할 단순 명쾌한 권선징악 구도가 깨지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옛날 활극영화는 흐름은 대하(大河) 같았을지언정 악당의 존재이유나 플롯, 이야기 구조는 명확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영웅적인 선인 주인공은 행복(과 미인)을 얻고 주인공을 괴롭히던 악인은 지옥으로, 아니면 운명에 의해 광야에 내쳐진 주인공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영웅신화의 완성까지. 아이언맨이나 배트맨, 슈퍼맨과 셰인, 로빈 훗, 또는 벤허의 차이라고나 할까.
또 드라마는 어떤가. 복잡미묘한 인간의 심리나 인간관계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간 요즘 영화들도 그 나름대로 의미와 의의가 있겠지만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9)’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1946)’ ‘워터프론트(1953)’ ‘이유없는 반항(1955)’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To Kill a Mockingbird 1962)’ ‘졸업(1967)’ 같은 영화들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온기가 피어오르게 만든다.
옛날 영화는 이와 함께 신기하다고 할까, 희한하다고 할까 잘 몰랐던 것들을 찾아보게 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몇 개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존 웨인과 스튜어트 그레인저가 공연한 코믹 서부극 ‘알래스카의 혼(North to the Alaska 1960)'에는 가발이 벗겨진 존 웨인의 민머리가 잠깐 나온다. 숀 코너리와 마찬가지로 존 웨인도 일찍부터 머리가 벗겨져 젊어서부터 가발을 쓰고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민머리를 본 관객은 거의 없다. 그만큼 그의 민머리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왔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이 영화의 후반 싸우는 장면에서 웨인이 한 대 얻어맞고 뒤로 넘어질 때 모자와 함께 가발까지 한꺼번에 벗겨지는 장면이 삭제되지 않고 나온 것이다. ‘서부극의 전설’ 존 웨인의 벗겨진 민머리를 보는 순간 민망하면서도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그런가 하면 1991년에 마틴 스코세이지에 의해 로버트 데 니로, 닉 놀티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고전 스릴러 ‘케이프 피어’의 오리지널(1962)에는 그레고리 펙, 로버트 미첨 두 주연 외에 TV드라마 ‘코작’으로 유명한 텔리 사발라스가 조연으로 나오는데 그가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출연한다. 율 브리너와 함께 양대 민대머리 배우로 널리 알려진 사발라스가 머리를 기른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드문 기회여서 눈이 번적 뜨인다. 사발라스는 1965년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성서영화 ‘위대한 생애(The Greatest Story Ever Told)'에서 본디오 빌라도역을 맡으면서 머리를 삭발한 이래 민대머리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는데 그에 앞서 머리를 기른 그의 모습은 민대머리 때와 사뭇 달라서 놀라웠다.
또 몇 차례 영화화됐으나 그중 가장 잘 된 것으로 평가받는 프랭크 로이드 감독의 1935년작 ‘바운티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에는 클라크 게이블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깎은 맨얼굴로 나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세기에 영국 해군은 수염을 기르지 못하도록 돼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깎은 것이라는데 덕분에 희귀한 게이블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영화에서는 나중에 대스타가 되는 데이비드 니븐이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도 볼 수 있다. 눈썰미가 좋다면.
진정한 영화팬이라면 옛날 영화도 가끔씩은 봐둘 것을 권한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