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구룡령 옛길의 금강송. 꿈틀대는 듯한 밑둥이 나무가 겪어낸 세월의 풍상을 보여준다 / 56번국도 구룡령 생태터널 / 백두대간 구룡령 표지석 / 개다래 꽃 / 까치수염 / 숙은노루오줌 / 갈퀴나물 / 미역줄 / 180년 수령의 금강 소나무 / 개옻나무 꽃 / 구룡령 정상 표지판 / 조록싸리 군락 / 양양·홍천=구성찬 기자
강원도 홍천군은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다. 강원도의 한 가운데를 홍천군이 차지하고 있고, 다른 시군들이 이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강원도 속의 강원도’, ‘알짜 강원도’인 홍천군에서도 내면은 ‘오지 중의 오지’에 해당된다. 십수년 전 내면 삼봉휴양림에 묵으러 가면서 춘천에 있는 친구에게 “휴양림으로 놀러오라”고 제안했다가 “거기가 어디라고, 춘천 아니라 홍천 읍내에서 출발해도 세 시간 걸린다”는 핀잔을 들었다. 어느 해 여름 밤 삼봉 휴양림에서 평생 봤을 별의 절반이상을 본 것 같았다. 하늘 반, 별 반이었다. 홍천군과 양양군의 경계인 구룡령 가는 길은 그런 추억들을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 ‘고장 난 시계 같은 세상’의 피난처
지난달 21일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56번 국도에 접어든다. 산과 산을 넘어 창촌 삼거리에서 양양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봉약수와 삼봉휴양림이 있다.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난리를 피해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일컫는 ‘삼둔 사가리’의 명지가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시인 황동규는 ‘세상이 고장 난 시계처럼 움직이면’ 이곳에 들어가 살겠다고 했다. ‘강원도 홍천군 내면에서 만난 개울,/ 우리 마음 이리 맑은 적 있었는가?/…/ 약수터 안내판 대신 “떠돌이 쉬는 곳./ 찬 물에 계속 뜨거운 머리 식히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열목어가 마지막 와서 몸과 마음 묻는 곳.”’ (‘삼봉약수’, 시집 ‘미시령 큰바람’, 문학과지성사 1994)
길이 고도를 더 높이기 시작하면서 급커브를 그린다. 용이 구불구불 휘저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아흔아홉 구비를 넘어간다고 해서 구룡령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실감난다. 56번국도 구룡령 구간의 정상은 해발 1013m. 백두대간 방문자센터 맞은편에 구룡령 옛길로 가는 입구가 있다. 여기에서 1.5㎞를 걸어가면 옛길 고개마루(1089m)에 닿는다. 이정표에는 남북으로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 동서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간다. 명개리와 갈천리를 잇는 옛길은 모두 6.2㎞. 이 가운데 갈천리에서 옛길 정상까지의 2.7㎞ 구간은 명승 제29호로 지정됐다. 옛길 가운데 명승은 구룡령 옛길을 포함해 문경새재, 문경의 토끼비리, 죽령 옛길 등 4곳뿐이다. 잊혀졌던 옛길이 현지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살아난 희귀한 사례다.
◇ 옛길에 얽힌 사연, 옛길에 깃든 이야기
갈천리 마을회관에서부터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계곡을 건너니 초입부터 금강송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이 베어지긴 했지만, 100~200년 된 금강송들이 곳곳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 중 한 개체는 가슴높이 둘레가 270㎝, 높이가 25m, 나이가 180세라고 안내판에 명기돼 있다.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지만, 거목들이 하늘을 가려 더운 줄 모르고 걷는다. 박달나무, 쪽동백나무 등 활엽수 가운데서도 키 큰 거목이 더러 눈에 띈다. 잎에 흰 빛, 또는 분홍빛 물을 들여 벌과 나비 등 중매쟁이를 불러들이는 개다래의 꽃이 보였다.
구룡령 옛길은 양양, 속초, 고성의 숱한 서민들이 건어물을 지고 홍천으로 넘어가 곡식과 바꿔 왔던 통로였다. 지게꾼과 가마꾼, 그리고 심마니와 약초꾼들도 이 길을 다녔다. 험준한 백두대간으로 갈라져 있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고갯길들 가운데 구룡령 옛길이 운두령 (1089m)과 같은 최고 높이를 자랑한다. 그래서일까. 양반과 선비들은 한양에 갈 때 비교적 낮은 한계령(1004)과 대관령(832)을 넘어간 반면 서민들은 주로 구룡령을 넘었다고 한다.
이 길에는 숱한 사연들도 얽혀 있다. 땀이 흐를 때쯤 만나는 묘반쟁이는 한 청년의 묘가 있는 곳이다. 반쟁이는 두 지점의 딱 절반이 되는 곳이다. 청년에 얽힌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양양과 홍천의 수령들이 같은 시각에 각자의 거처에서 출발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두 고을의 경계로 삼기로 하는 약속을 했다. 양양 수령을 모시던 노비가 수령을 업고 열심히 달렸다. 그 덕에 두 고을의 경계는 홍천 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탈진한 노비는 돌아오는 길에 그만 숨지고 말았다. 양양 수령은 이를 가엾게 여겨 큰 묘를 써 줬다는 이다. 평탄한 능선길 양옆으로 조록싸리 꽃이 터널을 이뤘다. 가지를 헤치며 약 50m의 조록싸리 터널을 통과했다. 하찮게 여겨졌던 작은 꽃들도 모여 있으니 무척 아름답다.
◇ 나무와 꽃을 품은 아늑한 통행로
길을 걷다보니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들게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냈음을 알 수 있다. 비탈길이어도 경사를 최대한 누인 길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은 숱한 옛 사람들의 지혜가 쌓인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큰 산의 등산로를 오를 때에는 주변 숲을 감상하기 어려운 비탈을 많이 만나지만, 이 길에서는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노새와 조랑말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던 장면까지도 그럴듯하게 떠오른다. 1992년에 포장된 56번국도 구룡령 구간을 따라 갈천리에서 명개리까지는 약 20㎞에 이르지만, 순하고 아늑한 옛길로 가면 6.2㎞에 불과하다. 56번국도 이 구간은 원래 1908년 일본이 목재와 철광석 등 자원 수탈 목적으로 개설한 비포장도로였다. 차도가 살짝 옆으로 비켜서 난 덕분에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의 영서와 영동을 잇는 옛길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는 길이다.
고지대에 서식하는 거제수들이 나타났다. 소나무들과 함께 굵은 소나무 그루터기들이 많이 보이는 솔반쟁이에 도착했다. 숙은노루오줌, 산꿩의다리, 터리풀, 눈개승마 등 야생화들도 보였다. 횟돌반쟁이는 장례식의 하관 때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한 회다짐을 하기위해 쓰던 횟돌을 캐던 곳이라는 뜻이다. 횟돌을 갈아 흙에 섞어 묘에 쓰면 단단해져서 나무뿌리가 관을 뚫지 못한다. 옛길 정상까지 가는 능선 길 나무들 사이로 포장도로가 언뜻 언뜻 보인다.
◇ 산적 소굴이 있던 곳에선 구름도 쉬어가고
23일에는 포장도로 구룡령 정상부터 백두대간 탐방로와 옛길 정상을 거쳐 홍천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속초시는 그냥 흐린 날씨였지만, 구룡령에는 고개를 차마 넘지 못하는 구름들이 쫙 깔려 있었다. 방문자센터에서 만난 숲길체험지도사 남상수씨는 “어제 이곳에는 제법 많은 소나기가 내렸다”면서 “홍천쪽 옛길이 많이 젖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설악산 대부분에서는 비가 오지 않았다. 구룡령에서는 구름만 끼면 비가 온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구름이 자주 갇힌다는 뜻의 구운령(拘雲嶺)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남씨는“포장도로 구룡령 정상 위치에는 과거 산적들의 소굴이 있었다”면서 “명지가리(명개리) 옛 주막터에서 10~15명가량 모여서야 고갯길을 함께 넘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1.5㎞의 백두대간 탐방로는 신갈나무, 피나무 등으로 단조로운 식생을 보였다. 그러나 명개리 쪽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원시림 분위기가 풍겼다. 터리풀 꽃, 금강제비꽃, 물봉선, 동자꽃, 벌깨덩굴, 박새, 투구꽃 등이 보였다. 남씨는 “갈천리 쪽이 양의 코스라면 명개리 쪽은 음의 코스”라며 “각각 목본과 초본이 우점한다”고 설명했다. 10분 쯤 걸어가자 물소리가 들린다. 구룡령 옛길은 양양 구간이 더 잘 알려졌지만, 홍천 구간이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어서 식생이 더 풍부하고 숲이 더 울창하다.
다시 10분쯤 가면 작은 계곡이 나타난다. 몸을 굽히지 않고 선 채로 물을 마실 수 있는 ‘서서물나들’이 나타난다. 샘물의 위치가 지금은 낮아져서 어른 무릎 높이 밖에 안 된다. 다시 30분쯤 가면 영골 약수다. 침팬지를 업은 모양의 피나무, 코끼리 얼굴을 닮은 코끼리나무도 만날 수 있다. 오리나무, 자작나무, 피나무, 물박달나무 등이 무리지어 서식한다. 특히 이끼와 양치식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관중이 사람 키만큼 자란 것도 있다. 남씨는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야생화된 고양이 등이 너무 많아 주민들은 골치 아프다”고 말했다.
◇ 열목어처럼 깃들 수 있는 넉넉하고 순한 옛길
백두대간꾼들 사이에서는 “구룡령을 넘지 않았으면 백두대간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한다. 오대산 자락의 두로봉에서 응복산~약수산~구룡령~조침령~단목령~점봉산~설악산 한계령까지 구간(58.4㎞)은 백두대간 능선 종주에서 체력소모가 가장 큰 코스중 하나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000m~1500m 급 봉우리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있어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급격히 바뀌는 구간이 많다. 이 구간에는 또한 백두대간 남한쪽 능선길 736.5㎞ 주변에서 가장 큰 나무 1, 2위가 살고 있다. 산지보전협회의 조사결과 구룡령~단목령 구간에 있는 피나무의 가슴높이 둘레가 608.8㎝로 가장 굵었다. 두 번째로 굵은 나무도 오대산 진고개~구룡령 구간의 피나무로 608.2㎝였다.
구룡령 옛길 정상에서 주말에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키보다 30㎝이상 높게 꾸린 배낭과 텐트를 지고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남씨는 “주변 경관도 감상하면서 천천히 산행을 즐기면 좋은데 백두대간꾼들이 말로는 이에 수긍하면서도 산에만 들면 100m 경주하듯이 내 달린다”고 지적했다. 그들이 즐겨 하는 말이 “무슨 코스를 몇 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자랑이라고 한다.
험준했을 구룡령 옛길을 무수한 사연이 담긴 발걸음으로 순하게 다듬은 선조들, 옛길을 살리려는 복원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마을 주민들, 남씨처럼 지친 도시생활과 불치병을 떨쳐버리고 노후를 편히 보내고자 열목어처럼 이곳을 찾아 깃든 사람들. 알록달록한 등산복과 많은 장비를 갖추고 관광버스를 대절해 몰려 왔다가 산을 ‘치고 올라가고’, 휘젓고 다니는 백두대간꾼들이, 넉넉하고 여유 있게 순한 옛길을 걷는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양양·홍천=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무수한 사연으로 순치된 길, 백두대간과 교차하는 구룡령 옛길
입력 2015-07-10 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