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국민은 국민투표에서 앞으로의 위험을 불사하고 긴축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올 초 선거에서 반(反)긴축 정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은 급진좌파연합(시리자)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그리고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은 국민투표로 ‘도박’을 걸었지만 오히려 재신임을 받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5년간 유럽의 가장 약한 경제를 ‘죽지 않을 만큼만’ 유지시켰던 긴축정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국민들의 간절한 요구”였다고 국민투표의 결과를 분석했다. ‘반대’표를 던진 그리스 시민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년간 긴축정책 하에서 힘들게 살아왔지만 나아진 것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국제 채권단의 한 축인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2일 “그리스에 부채 탕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채찍보다 당근론’을 제시하면서 협상 타결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도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긴축 프로그램이 조정되고 채무 탕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리스를 강하게 밀어부친다면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 국가들도 비난을 면치 못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측은 “‘반대’표는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의미한다”면서 ‘찬성’표를 호소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이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해석도 나왔다. 그리스 시민 이리니 아포스톨로폴루는 “그런 말은 선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 딜레마였다”면서 “우리는 유럽에 있고 싶다. 이 투표는 유로와 드라크마(그리스의 옛 화폐)를 결정하는 투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국민투표를 앞두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자살하지는 않는다”면서 찬성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자신했으나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역사적인 배경도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리스에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긴축을 요구하고 있는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이 그리스를 점령하고 국민들을 강제 징병 등으로 희생시켰다.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 협상이 진행 중이던 올초 독일 정부에 2787억 유로(약 347조원)의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독일이 이를 거부하면서 국민들의 악감정도 커졌다. 그리스어로 반대를 뜻하는 ‘오히(Oxi)’라는 단어 자체도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1940년 10월 당시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그리스로 진격했을 때 이오니스 메탁사스 그리스 총리는 굴복하지 않고 ‘오히’라고 외치고 이탈리아군을 막아냈다. 그리스는 이날을 ‘오히 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와 바루파키스 장관 등 ‘협상 대표’들의 애국심을 북돋우는 발언도 국민들의 마음을 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퇴를 표명한 바루파키스 장관은 이번 국민투표에 대해 “유럽의 소국이 부채의 구속에 맞서 일어선 특별한 순간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그리스는 왜 ‘오히(Oxi)'를 택했나
입력 2015-07-06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