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을 뚫은 전문직 여성들이 뭉쳤다.
아나운서, 변호사, 쥬얼리 디자이너, 호텔리어, 플로리스트, 교수 등 우리 사회에서 일가를 이룬 여성이자 50대 엄마들이다. 여성 고학력 첫 세대이기도한 이들은 1980년대 대학을 마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남은 이들이다. 퇴근하면 앞치마 두르고 살림하며 애를 키웠다. 그 엄마들의 딸들은 대개 스무 살이 넘었다.
이들이 ‘크리스마스 패션쇼’라는 연극 무대를 꾸몄다. 연극 무대에서 패션쇼를 하는 내용이니 ‘이중 극’이 됐다.
아나운서 강영은 유영미 등 연극 무대서다
화려한 패션쇼를 준비한 이들은 송현옥(54·세종대 교수) 연출을 중심으로 이명순(54·웨딩드레스 디자이너) 유영미(53·SBS 아나운서) 강영은(MBC 아나운서) 이애리(51·중부대 교수·전 호텔리어) 전주혜(50·변호사) 곽영미(50·플로리스트) 이정순(50·쥬얼리 디자이너) 등이다.
이들의 딸 오주원(29·연극배우·송현옥) 한민정(24·행동치료사·강영은), 김수진(21·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이명순) 서예지(20·뉴욕패션기술대·이애리) 양현진(서울 대원국제중 2년·전주혜) 등도 엄마의 무대에 동참 한다.
이 7인의 전문직 여성들은 지난 20~25년 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꿈꾸며 앞 만 향해 달렸다. 직장과 가정이라는 병립 불가능할 것 같은 두 축을 양 손으로 세우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직장과 결혼생활 병행’이라는 지도 없는 정글을 지나야 했다. 실수 투성의 직장 새내기였고 초보 엄마였다.
그렇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주문처럼 외우며 분투기를 썼던 이들. 그들은 어느 덧 후배 직장 여성들의 멘토가 됐다. 몇 년 안에 정년퇴직도 앞두고 있다.
이들은 “길 없는 길을 걸어와야 했다”고 말했다. 독도법을 가르쳐 주는 이 또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얘기를 통해 ‘일하는 후배 여성’을 위한 멘토링에 나섰다. 가까이는 자신들의 딸들에 대한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지 말아라’일 것이다. 이들은 젊은 시절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야를 외쳤던 이들이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가 된 그녀들
판사 출신인 전주혜 변호사는 이들을 여성전문가 모임에서 만났다. 송현옥·이명순을 중심으로 뭉친 것이다. 이들은 전문직 여성으로서 가감 없는 자기 고백을 통해 딸들과 후배 직장 여성들에게 독도법을 알려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패션쇼’ 탄생의 배경이다.
송 교수를 제외한 누구도 무대 경험이 없다. 그렇지만 학예회 수준이더라도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대에 따른 비용은 십시일반.
지난 29일 밤 서울 세종대 공연연습실. 두어 달째 공연 연습에 매달리고 있는 ‘엄마와 딸’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송 교수가 이끄는 극단 물결의 안무가 이영찬을 비롯해 배우 안성욱 오주원 김지현 등이 패션쇼극을 준비하는 ‘7인의 50대 전문직 여성’을 도왔다.
이들은 안무가 지휘에 따라 워킹 연습에 나섰다.
“선생님들, 걷는 게 이상해요. 천천히. 더 천천히. 눈에 힘주시고요. 앞에 걷는 분 빠지면 뒤 분들 준비해 주시고요.”
그 ‘선생님’들은 패션 전문채널에서 본 것처럼 당당하게 때론 요염하게 발을 내 딛는다. 그리고 스팟(spot)에 서면 강렬한 눈빛으로 발아래 관객을 집중 시킨다. ‘보아라 나다’하는 자신감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처럼 세상을 관통한 여성 오피니언이자 내 딸을 이렇게 키웠다는 자존감 넘치는 엄마의 표정이다.
오주원 한민정 등 엄마를 응원하기 위해 무대에 선 딸들은 그런 엄마와 같이 또 따로 호흡을 맞춘다. 그 어린 딸들을 업고 어르며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방송 시간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유학생활을 견딘 모성들이다. 그녀들은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
화상 중에도 “일할 수 있게 해주세요”
‘크리스마스 패션쇼’는 이들이 패션쇼를 준비하며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그대로 무대로 옮겼다. 서툰 이미지메이킹과 워킹 연습이 극이 되고 패션쇼가 되는 것이다.
패션쇼에 이어지는 극은 그녀들의 삶이기도 하다. 종합건강검진을 받고 간호사로부터 “결과가 안 좋게 나와 내원하셔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겠다”는 전화를 받은 강영은은 “네? 정밀 검사요? 언제 가야 하죠? 요즘 회사 일이 좀 바쁜데…”라고 말한다. 실제 그녀는 수술 후 건강관리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다.
이애리는 호텔 리어 시절 회사와 집을 쳇바퀴처럼 돌았다. 어느 날 아들이 떡꼬치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익숙지 않는 솜씨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콸콸 붓고 불을 최고로 올려 떡을 넣었다. 기름이 볼케이노처럼 천정에 올랐다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3도 중화상이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의사를 붙잡고 말한다.
“선생님, 저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세요.”
그들의 세월 마디마디는 극 속에 대사와 연기로 녹아 있다. 지난 아픈 과거를 오늘 에피소드로 만드는 힘을 지닌 이들이다.
강영은 아나운서는 “대한민국에서 워킹맘으로 열심히 우리 세대와 후배 여성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4일 오후 8시, 5일 오후 4시·7시 서울 대학로예술극장(문의 010-8762-8475).
사진은 왼쪽부터 이애리 강영은 전주혜 이명순 유영미 곽영미 이정순. 극단 물결 제공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강영은 유영미 아나운서 등 20대 딸과 '크리스마스 패션쇼' 한다
입력 2015-07-02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