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동 부리다 술깨면 “화해합시다”… 경찰, 오락가락 취객과의 전쟁

입력 2015-07-01 17:45

지난 26일 새벽 경찰관들에 이끌려 서울 용산경찰서로 들어선 조모(24·여)씨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그는 앞서 오전 4시50분쯤 용산구 이태원의 클럽에서 박모(34)씨와 멱살을 잡고 싸웠다. 춤추다 어깨를 부딪친 게 발단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였고 피차 취해 있었다.

박씨는 시비가 붙은 조씨에게 “네 부모는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걸 아느냐”며 면박을 줬다. 말이 거칠어지면서 부모 욕까지 나왔다. 말싸움은 몸싸움이 됐다. 인근 파출소 직원들이 신고를 받고 와서 뜯어말렸다. 격해질 대로 격해진 두 사람은 경찰관을 사이에 두고 “경찰서로 가자!”고 소리쳤다.

원하는 대로 경찰서로 넘어온 조씨와 박씨는 둘 다 폭행 혐의로 입건돼 조사를 받았다. 여기서도 질세라 서로 처벌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씨는 박씨가 퍼부은 말들을 놓고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울먹이기도 했다. 조사는 2시간가량 이어졌다.

오전 8시쯤 담당 형사가 조사를 마무리하려고 하자 조씨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말했다. “저 사람이랑 합의할래요.” 얼굴에 가득하던 분노는 술기운과 함께 사라져 있었다. 박씨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 형사과 철창문을 열고 나온 두 사람은 날이 환하게 밝아온 경찰서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전국 경찰서에서는 이 촌극 같은 장면이 하룻밤에도 여러 번씩 펼쳐진다. 술에 취한 채 싸우다 경찰을 찾은 사람 중 상당수가 술에서 깨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화해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다. 경찰관은 흥분한 사람들을 밤새 어르고 달래며 조사하고서도 대부분 이 한마디에 사건을 접어야 한다. 단순 폭행은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 관계자는 1일 “술 취해서 마구 난동을 피우다가 술 깨면 ‘별로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다들 합의하고 간다. 밤새 거의 주취자(취객)만 들어오는데 다들 이런 경우”라고 전했다. 날마다 이렇게 주취자에 시달린다는 그는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112로 접수된 주취자 관련 신고는 14만3003건이다. 경찰청 생활안전과 관계자는 “주취자 관련 사건은 시비, 행패소란, 폭력, 무전취식, 보호조치 등으로 다양하게 접수될 수 있다. 실제 주취자가 연루된 사건은 통계보다 10배는 많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같은 기간 전체 112신고건수(903만7857건)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16%까지 늘어난다.

일선 경찰관들이 체감하는 주취자 관련 사건의 업무 비중은 이보다도 크다. 술에 취한 사람은 대개 조사에 비협조적이어서 다른 사건보다 조사에 애를 많이 먹기 때문이다.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사불성이거나 잠을 자버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다른 사람이 조사받는 걸 듣고 “맞을 만하네”라는 식으로 시비를 걸기도 한다. 그러면 조사가 중단되고 형사들은 싸움 말리기에 바쁘다.

한 일선 형사는 “주취자 관련 사건을 처리하는 데는 보통 5시간 정도 걸린다. 자버리거나 하면 7~8시간도 걸린다”고 했다. 보통 단순 폭행사건은 1~2시간이면 끝난다. 그는 “주취 폭행 사건 중엔 별일 아닌데 넘어오는 경우가 많아 행정력이 낭비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을 허탈하게 만드는 사건 당사자 간 막판 합의가 거꾸로 행정처리비용을 절약하게 한다는 평가도 있다. 곽대경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소한 사건이 검찰이나 법원까지 넘어가지 않고 초기 단계에서 종결되는 것”이라며 “더 큰 비용을 절약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경찰 입장에서는 헛수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찰이 처벌만을 위한 업무를 하는 건 아니다. 당사자들을 화해로 이끄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 반의사불벌죄가 아닌 성폭력이나 상해 같은 사건은 합의해도 소용없다.

강창욱 심희정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