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양반 지식인이자 한학자였다.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 유학에 나섰다가 도쿄 농학사(農學社) 설립자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쓰다 센(津田仙)을 만났다. 쓰다 센에게 받은 한문성서를 읽던 그는 예수의 도(道)에 압도됐다. 도일(渡日) 7개월 만인 1883년 4월 29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녹스(Knox)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일본성서공회 헨리 루미스 목사의 요청으로 한문성경에 이두식 토(吐)를 단 ‘한한(漢韓)신약성서’를 출판했다. 1885년 2월에는 국한문 혼용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땵’(사진)를 출판했다. 한국인 최초의 성경 번역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주재 미국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한편 미국선교부에 한국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조선의 마게도냐인’(행 16:9)이란 별명을 얻은 이수정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이덕주)와 아시아언어문화연구원(원장 정제순)은 30일 일본 도쿄 재일한국YMCA센터에서 ‘이수정 마가복음 출판 130주년 기념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심포지엄은 한·일 학자 4명의 발제와 국내 학자들의 논찬이 이어졌다.
기조강연에 나선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이수정이 한국 교회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성경번역”이라며 “최초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피선교국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들어갔다는 것은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제물포 입국 시 이수정의 마가복음을 가지고 입국했고, 언더우드는 이후 마가복음 개정판을 발간하며 그 정신을 계승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수정 번역본이 양반 지식인층을 겨냥한 것이라면 로스역은 민중들을 위한 성경이었다”며 “한국 성경 번역사에서 두 전통은 한동안 이어져왔다”고 말했다.
김성은 전남대 교수는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된 이수정의 ‘마가복음’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적합한 문체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로스역 성경이 순 한글이긴 했으나 당시 한국어 문법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이수정은 언해(諺解) 형식을 재발견해 번역 문체에 활용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논증 사례로 이수정의 국한문혼용체가 1910년 이후 한국인에 의한 성경번역에 영향을 주었고, 1910년대 신문·잡지 등 계몽 매체를 선도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서정민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이수정에게 영향을 끼친 당시 일본 기독교를 조명했다. 서 교수는 특히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푼 당사자는 녹스 선교사가 아닌 야스카와 도루였다고 주장했다. 이 점은 국내 학계와는 다른 주장이다. 국내에서 야스카와 도루는 이수정에게 한문으로 세례문답을 했던 일본인 목사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심포지엄에서는 오카베 가즈오키(요코하마 프로테스탄트사연구회) 대표가 일본 개신교 최초 선교사인 햅번(JC Hepburn)과 일어 성경번역에 대해 발표했다.
심포지엄 참가자들은 앞서 29일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시바교회를 방문했다. 시바교회는 일본 도쿄 중심가의 미타토구 도라노몬에 위치해 있다. 시바교회는 로게츠쵸교회가 그 뿌리다. 로게츠쵸교회는 1869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크리스토퍼 캐로더스가 세웠다.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이수정은 성경을 번역했고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을 앞당겼으며,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이수정 성경번역 130주년 심포지엄] 최초 성경 번역… 美 선교사 내한 앞당겨
입력 2015-06-30 23:24 수정 2015-06-30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