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작명의 예는 또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다른 이들에 비해 다소 긴 이름인 그는 우리나라 네티즌 사이에서 짤막하게 동림옹으로 불린다. 이스트우드(Eastwood)를 직역한 동림(東林)에 노인이라는 뜻의 옹(翁)자를 붙인, 나름대로 존칭이 곁들여진 한국식 약칭 또는 ‘아호(雅號)’인 셈이다.
그러나 ‘조토끼’라는 한국식 별명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조지프 고든 레빗(Joseph Gordon-Levitt)이라는 젊은 배우의 한국식 애칭이지만 그를 조토끼라고 부르는 것은 망발도 이만저만한 망발이 아니다. 우선 조지프 고든 레빗을 조 레빗으로 줄인 것부터 잘못이다. 그의 성은 고든-레빗이다. 그냥 레빗이 아니다. 우리식으로 치면 남궁이란 성을 남씨, 혹은 궁씨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레빗의 l과 토끼라는 래빗(rabbit)의 r 발음은 완전히 다르다. 아울러 ‘ㅐ’와 ‘ㅔ’도 분명히 다르다. 레빗을 래빗으로 인지하는 것은 l과 r을 밥 먹듯이 혼동하고, 메그 라이언을 맥 라이언이라고 하거나 ‘찌개’를 흔히 ‘찌게’로 쓰는 데서 보듯 ‘ㅐ’와 ‘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꿔 쓰는 고질적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다.
갑돌이를 갑동이나 갭돌이라고 하면 모욕감과 함께 분노마저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별나게 이름에 집착한다. 어쩌면 조선시대 이래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온 유교의 정명론(正名論)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외국인들의 이름은 함부로, 제멋대로 부르고 표기하기 일쑤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대단히 우수한 문자가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대체 왜 그럴까.
우선 일본 식민지 시절의 잔재가 남아서일 수 있다. 개화기부터 식민지 시대까지 서양 문물을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해 훑어 들인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다. 해방 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그런 관행이 거의 사라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배우나 감독들의 이름은 대체로 일본식이었다.
‘일본식’이 어떤 것인가. 일본어는 우리말과 달리 없거나 못하는 발음이 많다. 우선 일본어에는 l 발음이 없다. ㄹ발음은 무조건 모두 r이다. 또 모음 중에서는 ‘ㅡ’ ‘ㅓ’ 발음도 없다. 그 결과 서부 제일의 총잡이 ‘셰인’ 앨런 래드는 ‘아란 랏도’가 되고 미남배우 ‘알랭 들롱’은 ‘아랑 도롱’이 된다. 이런 일본어 표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아란 랏드’ ‘아랑 드롱’이 된 것이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나마 이제는 거의 그 같은 표기가 사라졌지만 심층 무의식에는 그런 관행이 아직 남아있는지 종종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는 경우가 있다.
꼭 ‘일본식’ 잔재는 아니지만 일본인들처럼 l과 r을 구별하지 못하는 잘못된 관행은 여전하다. 예컨대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마틴 스코세이지라야 맞다. Scorsese의 r은 우리말 표기시 발음되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한다. r을 l로 읽으니까 스콜세지가 되는 것이다.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가 공연한 프랑스 영화 제목으로 쓰였던 이탈리아의 모자 명품 Borsalino 역시 볼사리노 아닌 보르살리노, 혹은 보살리노라고 해야 한다. 볼사리노라고 하면 이탈리아에서 그 모자를 결코 살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칫하면 l과 r을 혼동하기 쉬운 예를 하나 더 들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무려 네 번이나 탄 명배우 Katherine Hepburn과 ‘보디 히트’ ‘장미의 전쟁’ 등에 출연했던 관능미 넘치는 여배우 Kathleen Turner, 그리고 여성으로서 아카데미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한 Kathryn Bigelow는 각각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 차례대로 캐서린, 캐슬린, 캐스린이다. l과 r을 주의하지 않으면 틀리기 십상이다.
또 외국어 이름에 무지해서 저지르는 실수도 있다. 명우 Eli Wallach를 일라이 월라크가 아니라 엘리 왈라치로 표기한다든가 명감독 Robert Altman과 Robert Aldrich를 로버트 알트만, 로버트 알드리치로 읽는 따위다. 이 경우 올트만, 올드리치라고 해야 맞다. Madeline Albright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매들린 올브라이트라고 하듯이. a가 ‘ㅏ’ 아닌 ‘ㅗ’발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말 표기법이 불합리해서 이름을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남매 배우인 John Cusack과 Joan Cusack은 이중모음 표기를 금지한 우리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남매가 둘 다 똑같이 ‘존 큐색’이 된다. 그러나 누나인 Joan은 당연히 조운이 돼야 한다. Joan을 존으로 표기한다면 왕년의 여배우 Joan Crawford도, 폴 뉴먼의 부인이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Joanne Woodward도 모두 남자이름인 존 크로포드, 존 우드워드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화, 국제화가 시대의 조류인 이제 외국 영화인들의 이름도 제대로 불러줄 때가 됐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