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별력과 결혼”
2015년 6월 26일 미국 대법원은 동성연애를 합법화하였습니다. 그동안 동성연애를 반대하던 주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동성연애를 불법으로 여길 수 없고, 이제는 미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성에 구속되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결혼의 법적 제도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단 몇 개의 주에서 동성연애를 합법화 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국민 중의 약 20% 정도만이 동성연애를 지지하였는데, 2001년 네덜란드에서 동성연애 합법화가 이루어지더니 유럽의 상당수 국가가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근래 들어 미국에서는 70%가 넘는 국민들이 동성연애를 찬성하였고, 이제 모든 주가 동성연애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미국 땅을 처음 밟았던 청교도인들은 경건함과 철저한 신앙의 훈련 속에 미국을 세웠습니다. 비록 전쟁과 자유를 향한 투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그러한 계속적인 변화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적절하게 형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는 “부의 한계, 자유의지의 타락, 권력의 타협” 등 다양한 문제들을 부각시켰습니다.
법은 한 국가를 질서 가운데 유지하도록 돕고 그것은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으며, 법을 어기면 불법이 되고 불법이 발각되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법 역시 사람이 정하기에 법은 항상 한계가 뒤따르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법은 사회와 문화의 흐름, 정치와 권력의 관계를 반영하며 변화무쌍하게 흘러갈 뿐입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동성연애자 숫자가 약 65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백인 남성 8분의 1이 동성연애자이거나 동성연애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변 매스컴과 드라마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동성연애자들을 볼 수 있으며, 한국은 수년전부터 영화와 드라마에서 동성애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종과 나라, 출생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이 부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며,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여기서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마음은 “심판”에 있지 않고,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계시며, 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 조차 동일하게 품으며 죄로부터 빠져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동성연애자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마음으로 보십니다. 비단 그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동일한 눈으로 보시며, 오늘 심판을 당하게 될 십자가 옆에 매달려 있던 강도 둘도 ‘긍휼’의 눈으로 보셨던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마음이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이 세대가 생각하고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특별히 동성애로 인해 상담을 하는 대부분들은, 어렸을 적 ‘충격’을 겪은 다양한 아픔들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인간관계속에서 생겨난 억압이나 적대감은 동성애로 전이되는 경우도 상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스스로를 상대적인 ‘피해자’로 규정하거나 그러한 의식을 발전키기도 합니다.
이런 연유로 동성연애자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샌프란시스코뿐 아니라 동성연애자들을 돕는 다양한 물질적 제도적 단체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각 사회마다 깊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라는 의식과 연결시키고, 그러한 의식을 토대로 사회를 개혁하고 자유를 얻기 위한 움직임을 보다 단계적,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 역시 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연애의 거대한 움직임은 이미 성경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다만 그리스도인은 거대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결혼의 관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교육을 하며 자신과 가정, 공동체와 사회를 지키며 변화시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4~5)
(2)“차별없는 용납과 결혼”
예전에 텍사스 댈러스 H마트 앞에 차를 세워놓고 내리던 찰나에 바로 눈앞에서 동성연애 커플을 목격했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동성연애 커플의 애정행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말로만 듣던 이들이었습니다. 뒷자리에 있던 초등학교 아이들이 볼까봐 조금 늦게 차에서 내린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에서 TV로 성 전환자를 본 적도 있고, 수많은 동성 커플들에 관해 듣기는 했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동성애 커플을 보고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떻게 생각하며, 앞으로 어떻게 아이들과 교회 공동체에서 가르쳐야 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라나고 있는 교회의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동성연애에 대한 부정적인 여러 의견들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동성연애의 심판으로 인해서 에이즈(AIDS)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반 동성연애”적인 시각입니다. 이들은 1980년대 에이즈가 최초로 보고되었을 때 대부분이 동성연애자였다는 것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반 동성연애의 시각은 보수적인 종교를 가진 이들 사이에서 깊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와 반대하는 또 다른 기독교 시각을 마주하는데, 곧 “친 동성연애”의 시각입니다. 지난 대법원의 판결이 있자마자 Cathedral of Hope의 성직자가 동성연애 커플을 주례했는데, 이 장면이 달라스 모닝뉴스를 통해 생중계 되었습니다. “친 동성연애”를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반 동성연애”의 시각과 “친 동성연애”의 시각은 서로 상충하는 입장이며, 동성연애가 합법화 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제도적, 교육적, 행정적”으로 친 동성연애의 성향으로 그 방향이 선회합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어떤 가치관과 관점을 가져야 합니까?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이 부분을 가르쳐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로 기억해 볼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정을 “결혼의 관계”로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속에 “결혼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통한 관계로 발전되었습니다. 즉 우리를 결혼의 관계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동성연애를 위한 신체적, 감정적, 정서적인 관계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의 신체적인 다양성과 독특성이 사라지고 모두 한 ‘성(Gender)의 형상’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의 관계 속에서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말씀했고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인 밖의 성적 행위 역시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 1:27)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에 기초하여 동성연애의 죄를 지적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고 일관된 어조로 동성연애가 왜 죄에 속하는지를 전합니다. 동성연애가 죄에 속한 이유와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말씀하고(레 20:13), 소돔이 멸망한 원인 중에 하나도 동성연애였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창 19:5).
또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대상 중에 동성연애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고전 6:10). 성경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여러 죄의 요소들 가운데 동성연애에 대한 경계를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단 동성연애뿐 아니라 우상숭배, 간음, 탐색, 도적, 술 취하는 이, 토색 등 죄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동성연애를 용인하는 입장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동성연애가 합법화 된 사회에서 살아갈 때, 두 가지 상충하는 의견을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일관적으로 사랑의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도록 권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태도를 가지라고 정죄하는 이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으나,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견지해야할 분명한 태도는 “용납”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동성연애자가 합법화된 나라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돌멩이를 가지고 동성연애자들에게 던질 수 없으며,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초한 남과 여의 결혼의 관계가 가진 장점을 다음세대에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차별 없이 전해야 합니다.
(3)“지혜, 거룩, 온전한 결혼”
어떤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은 사무실 안의 대부분이 동성연애자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동성연애자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동성연애를 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신입사원은 회사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동성연애자들을 대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동성연애를 합법하화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지혜와 순결함, 거룩함과 온전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회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져도, 우리는 각자 스스로 자신의 영적 건강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10년 후의 건강은 10년 전에 미리 튼튼히 준비한 자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일찍부터 건강하고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우리 스스로가 감당하고 유지해야 하는 각자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복음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전해지고 주어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빌 1:27)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생명, 우리에게 주어진 결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라는 언약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져 있는 제도이지만,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마음을 잘 세우고, 하나님께서 명하신바 생육하고 번성하는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그에 맞게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창 1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되기에 자유는 항상 질서를 수반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각자 스스로가 지켜야 하듯이, 모든 질병과 방종에서 지켜내는 일은 각자에게, 커플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시 18:23)
1981년 6월 5일 미국 질병관리예방센터에서 다섯명의 치명적인 폐렴 환자가 보고된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에이즈가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로스엔젤레스의 남성 동성애자들이었습니다. 그만큼 동성연애가 가진 위험성은 상식을 넘어섭니다. 에이즈는 지금까지 약 280만명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세계보건기구 역시 매우 심각하게 여깁니다. 치사율이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완치가 불가능해 더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단 에이즈뿐 아니라, 오늘도 새로운 감염과 질병의 상당수는 대부분 잘못된 성행위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만약 생리적, 신체적으로 건강한 결혼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커플들이라면, 이러한 여러 감염을 미연에 자동적으로 예방할 수 있습니다. 실제 에이즈 사망자의 50% 이상은 동성연애로 인한 감염의 결과인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만약 동성연애가 건강한 관계에서 비롯되고 생리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주는 것이라면, 그로 인한 ‘바이러스의 감염이나 질병’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이즈에 걸린 이들 모두를 단순히 죄로 인한 심판의 결과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며, 질병이나 재해 등을 단순히 심판의 결과물로 간주하는 일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세계를 헤아릴 수 없고, 우리는 그러한 위치에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연재해나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개입하셨는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듯이, 심판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인 것을 항상 자각하고, 다만 우리 각자는 마땅히 형성해 나아가야할 결혼의 관계를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결혼을 한 커플이 술을 좋아하고 취해 살다가, 술에 중독이 되어 가정생활이 어려워지는 결과가 나타났다면, 술 중독이나 가정생활의 파멸은 죄를 용납한 결과물이 됩니다. 동성연애 역시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로 인한 필연적인 질병이나 어려움은 남과 여의 결혼을 통해 해결되고 건강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동성연애의 죄로 인해 양산되어지는 새로운 어려움들을 “성경적인 결혼”을 통해 미연에 예방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남과 여의 결혼의 관계”를 추구하고, 그에 반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인내하며 사랑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혐오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으나 사랑의 복음은 한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들을 귀가 있는 모두에게 선포되어질 것입니다.
“너와 간음한 사람과, 동성연애자 모두여! 다시는 너희 죄를 범치 말라”(요 8:11)
(4) “겸손, 경건 위에 사랑으로”
예전에 기독교인이 동성연애자들의 축제를 힘으로 저지하려는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서 접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며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힘으로 사람을 제압하려는 건 오히려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의 의미를 희석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소수자를 탄압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때, 더 큰 대의를 잃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답답함과 타협할 수 없는 현실적인 신앙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방향이 사회와 기독교의 담을 더 많이 쌓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념으로는 동성연애를 반대하지만, 나와 싫은 사람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일반인들은 유심히 지켜봅니다. 이러한 잣대를 통해 기독교를 많이 평가하고 교회를 판단합니다. 이러한 평가와 신용은 장기적으로 선교와 전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어떤 문제이든지 힘으로 해결하려드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가 가져야 할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지적하였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재판석에 올라서지 않도록 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있는 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어서 스스로 돌아보고 죄에 빠질 수 있는 다양한 환경들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면, 다양한 죄의 결과들로 인한 파멸을 줄여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스스로 겸손히 깨어 있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성을 너무 가볍게 사귀거나, 감정의 노예가 되는 약점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면, 이성교제를 할 때 조금 더 진지하고 오랫동안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감정을 따라 쉽게 반응하던 모습을 지양하며, 몸과 마음을 단정히 건강한 결혼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신앙의 방향성은 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뿐 아니라 여러 문란한 영향력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습니다(시 1편).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처럼 신실함과 거룩함을 지키는 건, 각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건함과 신실함에서 비롯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러나 만약 이미 죄에 깊이 빠져 있다면 상황이 다릅니다. 죄에 속해 눈이 가려지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겨납니다. 동성연애자와 그로 인해 고민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면, 담배를 많이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은 결국 자신이 절제하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 33:9)
이미 10년 전에 동성연애를 합법화 한 캐나다는 동성연애를 죄로 여기면 감옥에 처해집니다. 이미 사회는 성경의 입장이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그것은 미국사회도 다를 바가 아닙니다. 여전히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생각하고 있다면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성경이 말씀하는 바, 동성연애를 포함한 자연적인 섭리의 거부와 상식적인 가치관의 거절은, 미국 사회, 문화와 가치관의 흐름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세속화가 깊숙이 형성된 사회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이와 같은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와 마음 가짐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모든 것의 해결점은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 주신 ‘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선에서 지키는 헌신이 필요하지요. 우리 모두에게는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사랑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셔서 형성하도록 만든 결혼의 관계를 거룩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결혼의 관계를 남과 여가 풍성히 누릴 때 여러 죄의 결과들과 위험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가정을, 사회를 보호할 수 있듯이, 동성애에 빠진 이들이 온전한 결혼의 풍성한 관계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여러 사회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5)“상처에서 회복의 결혼으로”
“목사님 어렸을 적부터 동성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경향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미국목사님이 이런 상담 내용을 듣고서,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였습니다. 선천적으로 자신이 동성연애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많은 이들의 고민거리입니다. 미국에 사는 많은 이들도, 동성애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의 고충 그리고 그것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신의 습성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동성연애에 관해 가장 빈번한 질문 중에 하나는, 동성애의 성향이 어렸을 적부터 있었는데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애 성향이 어릴 적부터 있었다는 증거는 유전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으며, 어릴 적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밝힐 길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동성애 성향이 나타나거나 아버지의 폭력, 성적학대 등의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경우 동성애의 성향을 강하게 보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불안한 환경 속에서 동성애 성향이 급속도로 발전한다는 일반적인 원인은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엄밀히 말하면,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은 하나의 “상처입은 피해자”로 분류해야 합니다. 또한 동성연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의하거나 찾아올 때, 눈물로 자신의 과거와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을 향해서 정죄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하나님의 긍휼과 치유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실제로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이 중보 기도를 요청하여 변화된 여러 사례들이 있습니다. 동성연애로부터 벗어나 정상적으로 변화되는 이들도 많이 있으며 미국에는 약 1000여명 가량이 이성애자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셔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저절로 되지는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돕고 기도함으로 얻어질 수 있습니다.
간혹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이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요청을 할 때,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고, 단한번이라도 동성애적인 행동을 옮기지 않도록 훈련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여정은 큰 인내력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영국의 니키검블은 주변에 동성애의 성향을 보이는 어린아이나 젊은 청소년이 있을 경우 초기에 적절하게 대처하며 현명하게 행동하도록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동성애 성향을 가졌다가 치유된(10년, 15년) 경우도 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만큼 초기 대응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성령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많은 이들이, 동성연애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아버지와의 신뢰관계의 부족으로 인해 동성애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녀를 둔 아버지는 늘 자녀와의 인격적인 관계, 신앙적인 지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 성령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된다는 규정을, 예수님께서 ‘사랑의 규정’으로 뒤바꾸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심판자로 처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이 있었는데, 오히려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이 죄를 청산하기 원하셨고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동성연애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죄처럼 ‘돌로 심판을 받을’ 죄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긍휼’의 눈으로 보시기에,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점이 예수님께서 ‘동성연애’를 용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말씀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렇게 동성연애를 죄로 규정하는 건 세속화된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대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동성연애자들이 동성애를 끊을 수 있도록 간구하며, 죄로부터 벗어나 돌아서도록 사랑의 마음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공동체에 이미 동성연애자들이 있을 때 교회의 리더로 임명하기 전, 이성애자가 된 후 훈련을 하고 리더로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넓은 가슴으로 동성연애자들의 ‘상처’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빛 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의 순결함을 가르치고, 육신적으로는 창조질서 안의 ‘건강한 결혼’을 지속적으로 교회와 다음세대에게, 그리고 사회에도 제시해야 합니다.
<약력>
감리교신학대학교및 신학대학원 수학, Southern Methodist Univiersity 신학대학원 수학, 현 댈러스 이단대책위원회 대표위원, 현 댈러스 뉴스코리아 및 중앙일보(미주) 기독교 고정칼럼니스트
미국 댈러스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김덕건 목사
기독교인은 동성연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입력 2015-06-28 11:18 수정 2015-06-29 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