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진보 마초’의 무덤은 ‘여성’…한윤형씨, ‘안전 이별’ 하셨나요?

입력 2015-06-21 17:16
자유기고가 한윤형 페이스북 캡처

‘진보’와 ‘마초’는 함께 쓸 수 있는 단어일까요? ‘진보’는 ‘성평등주의’를 포함하는 가치입니다. 전형적인 남성다움을 일컫는 ‘마초’와는 어울리지 않죠.

그런데도 ‘진보마초’라는 말이 두루 쓰입니다. 성평등 문제는 뒷전에 둔 채 계급투쟁과 노동운동에만 천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최근 몇 년 새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가 활성화되며 진보 진영의 문제 제기가 수월해졌고,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성평등 관련 이슈들은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뤄졌습니다. ‘진보마초’들이 맹위를 떨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졌죠.

‘진보마초’가 일으킨 데이트폭력 사건이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발단은 진보 성향 자유기고가 한윤형씨의 전 여자친구 A씨가 SNS에 올린 폭로글입니다. A씨는 “나 팼던 구남친 여전히 진보필자연하며 행복하게 잘 사시는…. 나한테 구타유발자라고 막 뭐라 했던 게 생각나는데”라고 적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씨는 안티조선운동 1세대로도 유명한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젊은 논객입니다. 페미니즘 관련 행사에도 얼굴을 비추며 성평등 문제에 많은 의견을 냈죠. 하지만 A씨의 글 때문에 ‘진보마초’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논란이 거세지자 A씨는 블로그에 한씨의 데이트폭력을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A씨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씨와 연애를 했고, 그 동안 여러 차례 구타당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이어 “주된 폭행 장소는 한씨의 자취방”이라며 “본격적인 폭력은 2009년 정도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습니다.

A씨는 “처음에는 한씨가 술을 많이 마신 채 폭행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A씨가 맞은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네가 나와 언쟁했기 때문에” “나를 못생겼다고 무시해서” “오늘 야구가 져서 기분이 나쁜데” “네가 좀 ‘구타유발자’라서” 등이었죠.

한씨는 곧바로 페이스북에 해명과 사과의 내용을 담은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피해자와 연애를 할 당시에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며 “그 부분에 대해서 과거에도 몇 번이고 사과를 했지만 다시 한 번 피해자에게 사과를 드린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한씨는 “제 입장에선 피해자가 부엌 바로 앞에 있었기에 식칼이라도 꺼내 들까봐 겁이 났다”며 자신의 폭력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변명도 함께 적었습니다.

A씨의 폭로에 용기를 얻은 여성 B씨도 블로그에 유사한 경험을 고백했습니다. B씨가 데이트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한 당사자는 ‘일베의 사상’을 쓴 진보 진영 필자 박가분씨였습니다. B씨는 박씨와의 연애를 “치가 떨리게 괴로운 나날이었다”고 했습니다. B씨에 따르면 박씨는 폭력적 행동은 물론, 당시 5년 동안 사귄 애인이 있었는데도 B씨에게 “나와 만나지 않으면 당내 활동을 접겠다”고 말했다는군요. 핵심 활동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B씨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박씨는 B씨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B씨와 자신이 소속된 노동당 당규에 따라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소통을 하지 않겠다면서요.

사실 진보 진영에서의 페미니즘 및 폭력논란은 이번뿐이 아닙니다. 가깝게는 2013년 인권운동가 고은태씨의 성희롱 파문이 있었죠. 고씨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을 역임했던지라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당시 고씨는 “인스턴트 메신저 대화를 통해 성희롱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며 사과했습니다. “변명하자면 상대방도 그런 대화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덧붙였지만요.

고씨와 한씨는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피해자나 네티즌들이 덧붙인 변명까지 모두 사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박씨의 경우는 사실관계가 확실히 밝혀지는 것이 우선이겠죠.

네티즌들은 진보진영의 스캔들에 공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 “왜 이제 나서는 것인가” “가해자의 밥줄은 누가 책임지나” “비판은 정당하지만 지나친 조리돌림도 폭력”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우리 안의 일베를 넘어 우리 안의 한윤형을 들여다보자”는 말도 있죠. 그러나 이런 의견은 가해자가 상응하는 처벌을 받은 후에야 통하는 말이겠죠. 갑자기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반성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이쯤에서 2002년 개혁당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했었죠. 성평등 이슈를 ‘조개 줍기’ 정도에 비유한 것이죠.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진보진영의 여성 인권 감수성은 땅에 떨어진 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땅의 ‘진보마초’ 여러분, 얼마나 어마어마한 해일이 밀려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일이 밀려오면 이를 막을 방법을 찾거나 얌전히 피하십시오. 애먼 여자를 때리지 마시고요.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