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에겐 시나리오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요.”
‘칸의 여왕’ 전도연의 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배우이자 전 세계가 인정한 전도연조차 선택할 시나리오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여배우들이 할 만한 영화는 얼마나 없을까요. 가히 짐작이 갑니다. 지난해까지 남성영화, 남자들의 캐릭터가 스크린을 지배했습니다. 여배우 기근이라는 말은 더 이상 새로운 이슈도 아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악착같은 여배우들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2015년 상반기, 가뭄의 단비처럼 여배우들의 맹활약이 빛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남자배우 못지않은 묵직한 포스를 풍겼던 김혜수가 있습니다. 4월29일 개봉한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경찰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하는 조직의 보스 역할을 맡았죠. 몸무게도 한껏 늘리고, 노메이크업 상태에서 기미도 보이며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고 살아남은 여자 보스 역할을 소화해냈습니다. 담배를 태우는 자태, 독주를 깔끔하게 한잔 넘기는 그 느낌조차도 보스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김혜수는 2시간 동안 영화의 중심을 잘 잡으며 끝가지 보스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5월27일 개봉한 영화 ‘무뢰한’은 제목만 봤을 때는 남자들의 액션느와르 느낌을 전합니다. 이 액션느와르 장르를 하드보일드 멜로 영화로 바꾼 이는 바로 전도연입니다. 강남 ‘텐 프로’에 속할 만큼 잘나갔지만, 지금은 퇴물 취급을 당하며 지방의 단란주점에서 마담으로 일하는 여자. 찌들만큼 찌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기대고 싶어지는 여자입니다. 전도연은 김남길, 박성웅 등 극중 센 남자들과의 멜로 호흡에서 ‘그래도 너를 믿고 싶다’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디테일한 연기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는 여배우의 포스, 멜로 여신 전도연입니다.
엄지원의 연기 스펙트럼이야 말고 놀랍습니다. 2013년 영화 ‘소원’에서 살을 어마어마하게 찌우고 평범한 옆집 엄마로 절절한 모성애를 보여줬었죠. 그녀가 6월18일에 개봉한 영화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에서 일제 강점기 시대에 미스터리한 기숙학교의 교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겉으로는 지적이고 우아하지만, 뭔가에 강박증을 가진 사람처럼 날카롭고 섬뜩한 이면을 가진 인물. 수백편의 일드를 보면서 일본어를 마스터해서 극중에서 자유자재로 구사를 했습니다. 6kg 쯤은 두 달 반 만에 빼버리는 독한 근성까지. 섬뜩하고 오묘한 교장 역할을 몸에 딱 맞게 소화해냈습니다.
김혜수 전도연 엄지원, 충무로 맏언니들의 활약에 김고은과 박보영 등 차세대 주자들까지 연기력에 이견이 없이 안정된 활약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고은은 ‘차이나타운’에서 영화를 전면에 끌고 가는데 전혀 부족함 없는 내공을 펼쳤고, 박보영도 ‘경성학교’에서 주인공으로 나서 그녀 특유의 수수함과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연기와 더불어 극 후반 지독한 복수극까지 2008년 ‘과속스캔들’ 이후 ‘괜히 박보영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 언니들을 바짝 추격하는 신예가 있죠. 바로 영화 ‘경성학교’의 박소담입니다. 박소담은 단편, 독립영화계에서 ‘제2의 전도연’으로 불리며 가능성을 인정받았었죠. 그녀가 ‘경성학교’로 첫 상업영화 주연을 맡아 담대하게 연기를 펼쳐 보였습니다. 신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당찬 모습에 ‘은교’의 김고은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박소담은 ‘경성학교’에 함께 출연한 박보영과 같은 반 단짝으로 출연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연기력을 선보였습니다.
김혜수 전도연 엄지원이 앞에서 끌고 김고은 박보영이 충무로 여배우들의 기근 현상에서 허리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박소담 같이 연기력 되는 신인까지 나타났죠. 남자배우들이 판치는 스크린에, 독하게 살아남으며 저력을 보여주는 충무로 여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조경이 기자 rookeroo@kmib.co.kr
‘독하게 살아남은’ 전도연·김혜수·엄지원에 박수를
입력 2015-06-21 14:57 수정 2015-06-21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