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은 연말과 함께 뮤지컬 시장의 양대 성수기로 꼽힌다. 평소 뮤지컬 시장 흐름을 보면 6월에 매출이 주춤했다가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고 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부터 다시 증가한다. 예술의전당과 LG아트센터 등 주요 공연장이 여름철엔 뮤지컬에 대관을 해주는 것도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올 여름도 서울의 1000석 이상 대형 공연장은 뮤지컬로 채워진 상태다.
다만 올해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라는 돌발 변수가 등장했다. 메르스 사태가 지속되면서 공연계 전체가 타격을 받고 있다. 전염성을 우려한 관객들이 극장 이용을 꺼리면서 공연이 취소 또는 연기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그러나 대형 뮤지컬의 경우 지난 한 달간 티켓 예매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박효신 김준수 등 인기스타가 나오는 뮤지컬은 메르스에도 불구하고 티켓이 취소되는 일 거의 없다. 제작사들은 메르스가 진정돼 뮤지컬계가 예년 같은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손꼽아 기대하고 있다.
◇빅스타 앞세운 신작=지난 4월 말 일찌감치 개막한 ‘팬텀’은 박효신을 앞세워 초반 마케팅에 성공했지만 악평에 시달려야 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되는 상황에서 연출과 배우의 호흡이 완벽하지 않은 채 개막됐던 탓이다. 후반에 접어든 현재는 작품이 전체적으로 안정된 모습이다.
‘팬텀’에 이어 화제를 모은 작품은 단연 JYJ 출신의 김준수가 출연한 ‘데스노트’다. 지난 1년간 한국 배우로는 처음 영국에 진출했던 홍광호의 복귀작이기도 하다. 일본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일본에서도 자국 뮤지컬의 해외 진출 시험무대로 주목하고 있다. JYJ를 비롯해 수많은 스타를 거느린 씨제스는 이번 작업을 시작으로 공연 사업 진출을 본격 선언했다.
세계 뮤지컬계의 거장 작사가 팀 라이스와 슈퍼밴드 아바(ABBA)가 만든 ‘체스’는 냉전시기 소련과 미국의 갈등을 체스로 풀어냈다. 조권(2AM), Key(샤이니), 신우(B1A4), 켄(빅스) 등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대거 출연해 팬들의 관심이 높다. 제작사인 엠뮤지컬은 SM이나 JYP, YG 등 연예계 매니지먼트사 소속 가수들이 뮤지컬 데뷔를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웰메이드 스테디셀러=지난 몇 년간 국내 뮤지컬 제작사들이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뮤지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몰린 가운데 제작사들이 경쟁적으로 배우 개런티를 높이는가 하면 시장에 대한 정확한 예측 없이 작품을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제작사들이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대에 올렸다하면 돈을 벌어다주는 레퍼토리를 2~3개 정도 갖고 있어서다.
예를 들어 신시컴퍼니는 ‘맘마이아’ ‘시카고’, 설앤컴퍼니는 ‘캣츠’ ‘오페라의 유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오디컴퍼니는 ‘지킬앤하이드’ ‘맨오브라만차’ ‘그리스’를 소유하고 있다. 신시는 올 여름 창작뮤지컬 ‘아리랑’을 제작하면서 일종의 안전장치로 브로드웨이 ‘시카고’의 투어 버전을 공연한다. ‘아리랑’이 수익은커녕 적자를 얼마나 줄일지가 관건인 만큼, ‘시카고’가 없다면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설앤컴퍼니와 오디컴퍼니 역시 스테디셀러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맨오브라만차’를 무대에 올린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는 박은태 윤형렬 한지상 최재림 등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남자 배우들이 출연한다. ‘맨오브라만차’에는 뮤지컬 흥행 보증수표로 초연 멤버이기도 했던 조승우와 류정한이 이름을 올렸다.
요즘 공연계에서 가장 핫한 제작사인 EMK는 ‘엘리자벳’을 다시 공연한다. ‘엘리자벳’은 국내에선 ‘모차르트’에 이어 소개됐지만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가 이끄는 비엔나 뮤지컬의 효시와 같은 작품이다. 옥주현이 올해 재공연에서도 여주인공 시시 역을 열연하고, 조정은이 처음 도전한다. 죽음의 신 토드 역으로는 신성록 전동석과 같이 캐스팅된 가수 세븐(최동욱)이 번갈아 맡는다. 세븐이 군 복무시절 ‘안마방 출입’ 논란으로 나빠진 이미지를 뮤지컬에서 회복할지 주목된다.
◇저력의 창작뮤지컬=해외에서 들여온 라이선스 뮤지컬이 지난 10여 년간 한국 뮤지컬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라이선스 비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완성도를 검증받은 작품이어서 제작사로서는 위험 부담이 적다. 이에 반해 창작뮤지컬은 국내 창작자들의 인재풀이 적은데다 초연부터 완성도를 보증하기 어려워 투자를 받기도 쉽지 않다. 국내 창작 뮤지컬의 대부분이 소극장 뮤지컬용인 이유다.
그래서 신시가 이번에 조정래 소설을 바탕으로 50억원을 투입한 뮤지컬 ‘아리랑’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모험이다. 2007년 ‘댄싱 섀도우’로 쓴맛을 크게 봤던 박명성 대표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누군가는 창작뮤지컬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연극 ‘푸르른 날에’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으로 최근 주가가 높은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이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관심이다.
‘데스노트’에 맞서 한국의 인기 웹툰 ‘신과 함께’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도 나온다. 국고 지원을 받은 서울예술단은 한국식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무악’을 내세우는 단체로 최근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서울시극단 단장에 임명된 중견 연출가 김광보가 오랜만에 뮤지컬을 연출한다.
한국의 대극장 창작뮤지컬을 대표해온 ‘명성왕후’는 시해 100주기였던 1995년 초연돼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연출가 윤호진은 “대본과 음악, 무대, 영상 등 변화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대대적인 수정 보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기념공연에는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신영숙이 명성황후 역할로 처음 무대에 선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올 여름 뮤지컬 전쟁이 벌어진다
입력 2015-06-21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