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칼럼] 복음화는 이웃사랑 실천을 통하여

입력 2015-06-15 09:28

“주여, 사랑에 미친 이여! 사랑에 눈 먼 이여! 신앙과 의지에 약한 나로 하여금 이 사랑에 불타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 모든 것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위해 고통 받으셨으니, 나 어찌 주를 위해 나의 고통을 바칠 수 없겠습니까? 매일 매순간 나의 십자가를 온전히 지게 하소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자기고백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셨는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하신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고 계시다.(이사야 49:15)

로마서의 저자는 ‘사랑은 하나님 율법의 완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로마서 13:10). 율법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져야 할 계명(또는 계율)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모든 계명의 전부이며 그 완성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첫째 계명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결국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말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요한1서 4:20).

바울 또한 “모든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하여(갈라디아서 5:14) 이를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답이라는 결론이다. 사랑이 단지 기독교인의 여러 가지 덕목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계명의 전부이며 완성이고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그 어떤 신앙적 실천도 허구이며 설득력이 없음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과 비우심을 보기 어렵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나셨고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하게 죽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다 (마태 20:28).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병든 사람, 멸시와 천대 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계셨고, 결국 그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길은 사랑과 겸손과 봉사와 고난과 자기죽음 뿐이었다. 모든 목회자들과 크리스천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양초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세상을 밝힌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화 운동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방법상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의 불일치 때문이다. 그리스도처럼 영과 육이 가난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복음화는 의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 교회가 영적 문제와 육적 문제를 분리하여 영적 문제에만 치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는 사랑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인간적인 응답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세상에 속하진 않으나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사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실행하신 것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두운 곳과 부패한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개혁과 쇄신이 절실한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거울과 기치 삼아 거듭나야 한다.

김신호 장로(전 대전시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