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24.크리스토퍼 리의 별세에 부쳐

입력 2015-06-15 14:11 수정 2015-06-15 16:55
영국 출신 베테랑 배우 크리스토퍼 리 옹(翁)이 별세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배우의 부음기사들을 훑어보노라니 기묘한 게 눈에 띄었다. 작은 역할에 불과했던 만년의 출연작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으로 돼 있고 드라큘라 얘기는 한 줄도 씌어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젊은(혹은 어린) 기자가 쓴 것 같은데 아무리 신세대라 해도 리 옹의 기사를 쓰면서 드라큘라를 언급하지 않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명색이 기자라면서 그토록 무지할 수가 있을까.

크리스토퍼 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당연히 흡혈귀의 대명사 드라큘라다. 그는 70여년 동안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리고 평생 드라큘라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영원한 드라큘라’였다. 사실 그는 드라큘라 외에 무수한 역할을 연기했다. 중요한 것만 봐도 셜록 홈즈와 홈즈의 형, 마이크로프트 홈즈, 또 다른 홈즈 작품인 ‘배스커빌가의 개’에서 배스커빌 백작, 동양인 악당 푸만추,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스카라망가, 그리고 만년에 젊은 세대에게 이름을 알린 ‘스타워즈’ 시리즈의 두쿠 백작과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사루만 등.



하지만 이 위대한 배우도 몇 번 ‘물을 먹은’ 적이 있다. 배우 초기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올스타 캐스트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 오디션에 참가했으나 ‘군인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떨어졌고, 의붓아버지의 조카인 007 작가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 제1작 ‘007 살인번호(Dr. No)’의 악당 닥터 노역을 제의했으나 제작자들이 이미 그 역할에 조지프 와이즈먼을 찍어놓고 있었던 탓에 리는 나중에 스카라망가가 되기에 앞서 닥터 노가 될 뻔하다 말았다. 또 만년에는 ‘X멘’시리즈의 악역 매그니토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준 주역 갠달프역을 탐냈으나 워낙 고령이어서 활발한 움직임이 힘들었던 탓에 두 역할 모두 영국 출신 동료배우 이언 매켈런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 옹은 영국 공포영화의 명가(名家) 해머사의 58년작을 시작으로 모두 8편의 드라큘라 영화에 출연하면서 벨라 루고시와 함께 최고의 드라큘라 배우로 꼽혔다. 1922년 무성영화 ‘노스페라투’를 시작으로 2014년 ‘드라큘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까지 이어진 브램 스토커 원작의 드라큘라는 2005년 현재 가공인물 가운데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영화화된 주제라고 한다. 그런 만큼 수많은 연기자들이 드라큘라를 연기했다. 그중에는 벨라 루고시, 론 채니 주니어, 존 캐러다인(TV극 ‘쿵후’의 주인공 케인과 영화 ‘킬빌’의 악당 빌역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캐러다인의 아버지) 같은 초창기 할리우드의 거물 공포영화 전문배우들부터 잭 팰런스, 프랭크 란젤라, 게리 올드먼, 제라드 버틀러 같은 신구(新舊) 유명 배우들과 함께 좀 특이한 케이스로 꽃미남의 대명사 조지 해밀턴과 ‘라틴 러버’ 루이 주르당, 패러디의 왕자 레슬리 닐슨이 있고, 가장 최근의 젊은 배우로 존 리스 마이어스와 루크 에반스까지 망라돼있다. 그러나 이 많은 배우들 가운데 드라큘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크리스토퍼 리다. 벨라 루고시를 꼽는 이들도 있지만 리 옹이 연기한 드라큘라의 매력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



그럼 그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엇보다 드라큘라가 귀족(백작)이어선지 리 옹의 귀족적인 풍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어머니는 백작부인으로 연원을 따지면 샤를마뉴 대제(大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카르디니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은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황제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문장(紋章)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명문이다. 리 옹은 또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E 리 장군과 먼 친척이 된다. 대학에서 고전학을 전공한 그는 특히 어학에 큰 재능을 보였는데 모국어인 영어 외에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러시아어와 스웨덴어, 그리스어는 어느 정도 하며, 심지어 만다린 중국어까지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천상 배우였다. 연기 외에 노래, 글쓰기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지만 그의 술회에 따르면 “연기야말로 나를 살아있게 해주는 것, 삶의 목적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들어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더빙이나 내레이션 등 목소리만 써서 연기를 해도 된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2013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필요악: DC코믹스의 초악당들(Necessity Evil: Super Villains of DC Comics)' 전편(全篇)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리가 우리에게 더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그의 성이 ‘이씨’라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이씨들이 영문으로 이름을 표기할 때 이승만 전대통령처럼 Rhee라고 하거나 Li로 쓰기도 하지만 Lee라고 쓰는 경우가 가장 많고 보면 리 옹을 ‘이 선생’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이 선생, 부디 좋은데 가셨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