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특정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으며, 싫다고 말하는 것 대신 쓸 수 있는 단어가 불안과 혐오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을 예로 들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르스에 대해 불안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메르스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만약 앞으로 메르스의 해결책이 확실하게 정리된다면 많은 이들은 메르스에 대한 불안을 혐오로 바꿀 것이다. 둘 다 싫다는 의미지만 서로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모두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예로 동성애를 들자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동성애에 대해 불안해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동성애에 대해 혐오를 갖지는 않는다. 이러한 입장의 대조에서 확인되는 바는, 불안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고려하면서 안 좋은 결과의 예측에 우려와 두려움을 갖는 것을 주로 의미하며 혐오는 어떤 것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와 통제를 의미한다. 그렇게 보자면 기독교인은 죄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보다 죄를 혐오하는 것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사례가 있다. 바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사람들은 돌을 들고 서 있다. 그들은 잘못이 없다. 말 그대로 모세의 법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의 질서에 순응하여 죄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하려고 모인 것이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말로 그들이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게 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모세의 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사람들을 이끈 것이다. 예수님 보시기에 죄에 대한 혐오는 잘못이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으나 지금은 ‘혐오의 권력’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좋겠다. 어떤 경우에는 혐오가 권력이 된다. 혐오를 가진 이들이 뭉쳐서 세력을 형성하다 보면 혐오의 대상은 그 세력에 눌리게 되며 강자와 약자의 관계처럼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혐오는 단순히 싫다는 거부감에 머무르지 않고 힘의 과시가 포함되는 것이다. 정적의 제거, 마녀 사냥이나 종교 전쟁 등, 혐오가 권력을 가져서 벌어지는 현상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최근 동성애 관련 집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메르스를 동성애 집회를 막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것처럼 글을 올렸고 이는 쇼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빠르게 퍼졌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났다. 두 가지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고 자꾸 생각하면 실제로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 그 때부터는 객관적인 시야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도 에이즈가 동성애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성애에 대한 불안도 이해할 만하고 동성애에 대한 혐오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동성애의 혐오가 권력을 가져서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하면서부터는 문제가 된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이 기도하면서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요한복음 9장과 누가복음 18장의 내용을 같이 고려해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혐오의 필수 요건이 분명하다. ‘권력’의 자리가 아닌 ‘죄인’의 자리에서 혐오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의식적으로는 나는 단지 혐오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불안과 혐오
입력 2015-06-12 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