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뺑(물적 피해 뺑소니) 사고, 부자 동네엔 적다는데…”

입력 2015-06-08 23:18 수정 2015-06-08 23:22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단지에 사는 주부 박모(33)씨는 지난달 24일 오전 11시쯤 전화 한 통을 받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 주차장에 세워 놓은 남편의 흰색 K5 차량 뒷부분을 들이받고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목격자의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범인을 잡았다.

하지만 처벌 여부는 미지수다. 피해자가 처벌을 강력히 원하더라도 보험이 가입돼 있을 경우 보상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어서다. 경찰은 이런 사건을 속칭 ‘물뺑’(물적 피해 뺑소니)이라고 부른다. 최근 서울 노원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온 교통사고의 70%가량이 물뺑일 정도로 노원구에서는 흔한 일이다.

법적으로는 5년 이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 벌금을 낼 정도로 처벌이 강하지만 혐의가 인정되는 경우는 100건 중 1, 2건에 그친다. 가해자가 한꺼번에 여러 차량을 훼손했다든지 피해 금액이 현저히 높아 보험 보상한도를 넘을 때 처벌 받기 때문이다.

현행 도로교통법 54조는 ‘사고 후 미조치’의 구성요건으로 ‘고의성’과 ‘도로 위 주행방해’를 명시하고 있다. 이때 고의성을 입증하려면 피해차량 블랙박스와 CCTV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주행방해’는 주차장이나 상가 등에 차량이 주차돼 있을 때는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뺑으로 생긴 파편이 도로 등 차량이 달리는 주행 구역에 떨어져야 처벌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노원경찰서 관계자는 “사고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다 보니 비슷한 사건이 더 자주 벌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서울 양천구 목동지역 아파트단지와 비교하면 노원구의 고민은 더 두드러진다. 양천경찰서에 따르면 관할구역의 전체 교통사고 중 90%가 접촉사고다. 물뺑은 거의 없다. 두 지역의 차이는 왜 생긴 것일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비원 숫자다. 1988년에 완공된 양천구 A아파트의 경우 12개 동을 경비원 50명이 담당한다. 1개 동을 4명이 관리하는 셈이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가며 순찰을 돌고, 차가 단지에 들어오면 주차를 마칠 때까지 감시도 한다. A아파트의 한 경비원은 “아파트단지 안에 수입차도 많은데 물뺑 사건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반면 노원구 B아파트는 28개 동을 경비원 56명이 관리하고 있다. 1개 동을 2명이 맡고 있는 꼴이다. 아파트 근처 노상에 세우는 차들도 많다. 이러다보니 물뺑 사건이 잦다.

단지 내 도로 폭도 차이가 난다. 1987년 지어진 B아파트 단지 안의 도로는 폭이 4m에 그친다. A아파트(8m)의 절반 수준이다. 도로 폭이 좁다보니 주차할 때 여러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B아파트의 한 경비원은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어서 외부 차량들이 거짓으로 방문증을 발급받아 단지 내로 들어오는 일이 흔하다”며 “물뺑 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편”이라고 말했다.

두 아파트 모두 지하주차장이 없다시피 하지만 지역 여건과 경제적 생활수준이 미묘한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물뺑은 지역 주민의 생활 현실을 보여주는 지표”라며 “보다 명확한 처벌규정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환 조효석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