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소백산이 펼쳐 놓은 철쭉꽃판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입력 2015-06-08 09:27

[사진설명] 소백산 야생화. 왼쪽 위부터 벌깨덩굴, 물참대, 쥐오줌풀, 감자난초, 큰앵초, 줄딸기꽃, 은방울꽃, 미나리아재비, 산앵도나무 꽃, 눈개승마, 붉은병꽃나무 꽃, 오미자꽃, 산괴불주머니, 노린재나무 꽃, 생열귀, 점나도나물, 솔나물, 풀솜대, 산장대, 사위질빵, 누른종덜굴, 소백산 비로봉 인근 철쭉 군락지. 단양=구성찬 기자

소백산 하면 겨울철 모진 칼바람부터 생각난다. 몇 년 전 2월말인데도 주능선에서 체감기온이 거의 영하 30도에 달했다. 매번 겨울산행 때마다 이곳에선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날려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늦봄의 화려한 철쭉터널을 통과하고, 여름철 야생화 천국을 접하고 나면 이렇게 장엄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산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실제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영주에서 북쪽에 우뚝 솟은 소백산 산세는 웅장함과 너그러움 등 서로 모순을 이루는 표현들을 아우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충북 단양의 철쭉제가 끝난 다음날인 지난 1일 소백산 주능선을 찾았다. 죽령에서 제2연화봉까지 다소 지겨운 시멘트 포장길을 거쳐 국립천문대가 있는 연화봉에 이르면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푸르고 부드러운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제1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등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은 다른 높은 산들과 달리 푸른 초원과 관목 숲이 어우러져 있다. “올해 하도 가물어서 철쭉 군락이 별로 예쁘지 않아요. 개화 타이밍은 단양군이 이번에 정확하게 맞췄지만 아쉽네요.” 동행한 소백산 국립공원 북부사무소 권철환 소장은 이런 저런 이유로 철쭉제를 찾는 관광객이 계속 감소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 ‘비단 장막 속’ 오감을 일깨우는 산길
연화봉에서 비로봉 가는 길에 온갖 새 울음이 귓전을 울린다. 소백산 북부사무소 이용욱 씨는 “천연기념물인 두견새를 비롯해 뻐꾸기, 벙어리뻐꾸기, 검은등뻐꾸기, 매사촌 등의 귀한 새들이 모두 소백산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쥐오줌풀, 광대수염, 큰앵초, 미나리냉이, 눈개승마, 벌깨덩굴 등의 꽃을 만났다. 쉽게 보기는 어려운 고산지대 식물인 연영초와 ‘숲의 요정’ 감자난초도 일행을 반겼다. 앙증맞은 애기나리, 졸방제비꽃, 두루미꽃, 풀솜대도 보인다. 흰 고광나무 꽃의 짙은 향기는 코를 즐겁게 한다. 오감을 일깨우는 산길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철쭉꽃이 일부 졌고, 많지 않은 꽃잎들도 상당수 타들어가긴 했지만, 녹색 절경 속 분홍빛 게릴라들의 도열은 강렬하면서도 몽환적이다. 연화봉부터 국망봉까지 4.5㎞ 구간 곳곳의 철쭉터널은 머리 위의 꽃, 땅에 떨어진 꽃잎, 활엽수 잎 위에 불시착한 꽃잎들이 어우러져 있다. 퇴계 이황은 “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고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 절기에 지리산, 소백산, 태백산 철쭉을 보러 다닌 게 십수번이지만, 제대로 절정을 포착했던 것은 지리산 정령치~바래봉 구간에서 딱 한 번뿐이다. 철쭉군락의 아름다움은 꽃에 한창 물이 올랐을 때 색채의 강렬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조선시대 일본철쭉에 반했던 강희안, 김창흡, 신경준 등 선비들은 꽃의 색이 짙을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꽃의 색깔로 볼 때는 철쭉, 진달래, 산철쭉, 왜철쭉 순으로 색이 진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무 하나에 핀 꽃과 군락의 꽃 대궐을 볼 때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조선시대 왜철쭉과 영산홍에 대한 열광은 에그조티시즘(이국적 정취에 대한 탐닉)의 성격이 짙었던 것 아닐까. 신경준은 영산홍을 사랑했지만, 영산홍이 꽃이 필 때 화려하지만, 시든 후에는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말라붙어 있는 추한 모습을 보인다는데 주목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철쭉제를 하면서 등산로 초입에 개량종 산철쭉이나 영산홍, 왜철쭉 등을 잔뜩 심어놓는다. 크기도, 색깔도 중구난방인 이들 꽃은 ‘천상의 화원’에 핀 철쭉과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소백산 관리사무소 김혜정 씨는 “철쭉 군락은 해발 1000m 넘는 곳에 있는데 지금도 하이힐이나 구두를 신고 철쭉 구경하러 오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이름과는 정반대로 산철쭉은 산(높은 곳)에 없고, 철쭉이 산에 있다. 산수유가 산에 없고, 생강나무가 산에 있는 것과 흡사하다.

◇ 백두대간이 품은 온화하고 아늑한 산
소백산은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동쪽 해안선 편으로 치우쳐 뻗어오다가 반도의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길목에 앉아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에서 매서운 칼바람도, 빼어난 조망도 비롯됐다. 날씨가 좋을 때 백두대간 소백산국립공원 구간(묘적봉~늦은목이) 45.2㎞를 걸을 경우 월악산, 속리산, 태백산 등 주변의 험산준령의 장쾌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긴 능선 구간을 지나는 동안 도솔봉(1314m), 제2연화봉(1357), 연화봉(1388), 제1연화봉(1394), 비로봉(1439), 국망봉(1421)까지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가 연봉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산세에 온화하고 아늑한 느낌을 부여한다.
정상인 비로봉(1439m) 주변에는 주중인데도 많은 탐방객이 몰려 있다. 비로봉 주변 4만5000여 평에 산재해 있는 200~400년생 주목 군락 1500여 그루는 천연기념물 244호로 지정돼 있다. 능선을 빼곡히 메웠던 주목들은 일제 강점기에 대거 벌목됐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3만여 그루를 헤아렸다고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주목 복원사업을 펼쳤지만, 더디게 자라는 주목은 쉽게 활착하지 못했다. 공단 측은 그 대신 어린 구상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주목 보호구역은 초원 위의 철쭉 군락과 어우러져 천상에 꾸며놓은 화원을 연상시킨다.
키 큰 나무(교목)가 잘 자랄 수 없는 아고산지대(해발 1300~1900m)에는 바람과 추위를 잘 견디는 키 작은 나무(관목)들이 다양한 야생화들과 사이좋게 살아간다. 꽃개회나무, 노린재나무, 오미자나무, 산수국, 구슬댕댕이, 아구장조팝나무, 생열귀나무 등이 꽃이나 꽃망울을 드러내고 있다.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5월에 피는 백합’ 은방울꽃도 보였다. 흰색의 작은 종 모양인 은방울꽃은 서양에서 ‘성모 마리아의 눈물’에서 피어난 꽃으로 통한다. 선과 악, 신앙과 이교 등 서로 반대되는 개념에서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는 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래서 이 꽃으로 만든 꽃다발이 행운을 가져준다고 믿는다. 종소리 대신 향긋한 냄새가 주변에 퍼진다.

◇ 사람을 살릴 ‘작은 백두산’이 베푼 조화
하산길로 택한 천동계곡 탐방로에 들어서니 양옆으로 주목 노거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이라는 표현대로 주목은 치밀한 조직 덕분에 고급가구나 바둑판 등으로 널리 쓰인다. 특히 고사목까지도 높은 관상가치를 지닌다. 소백산의 깃대종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꽃 가운데 하나인 모데미풀도 주목 서식지와 인근의 습기 많은 곳에서식한다. 그러나 올해 일렀던 봄 더위로 인해 개화가 빨랐던 탓에 아쉽게도 꽃은 이미 지고 없다. 모데미풀은 전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한국특산속으로 설악산에서 한라산까지 전국 고산지대에 분포한다.
고산지대에만 서식하는 누른종덩굴의 노란꽃도 피었다. 층층나무 꽃이 아직 남아 있다. 북한산보다 한 달 가까이 늦는 셈이다. 하산길 곳곳에 함박꽃나무(산목련)가 꽃망울을 달고 있고, 개중에 몇 송이는 꽃을 피웠다. 물참대와 고광나무의 흰 꽃을 자주 볼 수 있다. 천동계곡 탐방지원센터에 가까운 곳에 서식하는 진달래과의 진객 꼬리진달래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나무와 풀을 관찰하다 보니 18㎞가 넘는 산행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로봉과 국망봉 사이에 소백산에서 유일한 정향나무가 있지만, 꽃이 이미 졌는지 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작은 백두산’이라는 소백산의 별칭은 산세가 부드럽지만 백두산의 기상을 품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실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넘어 가다가 ‘사람 살리는 산’이라면서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일화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소백산에 대해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으며,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서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다”라고 적었다.
그렇지만 소백산도 세상의 번잡함과 대기오염,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국립천문대 천체관측소에서 30여 년 전에 비해 별이 잘 안 보인다고 한다. 단양시와 경북 영주시의 도시화, 관광지화에 따라 빛 공해가 심각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백산 북부사무소 권 소장은 “(단양의) 시멘트 공장들에서 내뿜는 매연 탓도 큰 것으로 안다”면서 “초봄에 산에 쌓인 눈이 녹으면 그 속에서 시커먼 검댕이 묻어나온다”고 말했다.
소백산 천상의 화원은 긴 겨울 두꺼운 눈 이불을 덮고서도 모든 에너지를 모아 봄과 여름에 사이좋게 차례대로 꽃을 피워내며 아고산지대의 조화를 만들어 낸다. 지상에서 갈등과 다툼을 이어가는 인간세상과 너무 대조적이다. 복사꽃이 아닌 철쭉꽃판 ‘별유천지 비인간’이라고나 할까. 소백산은 최근 설악산이나 지리산과는 달리 그나마 이런 저런 개발 광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라는 점이 큰 다행이다.
단양=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