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의 4일 긴급 브리핑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으니 “우리 살 길은 우리가 찾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태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현 정부가 처한 무기력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 시장은 브리핑에서 “직접 대책본부장을 맡아 진두지휘하겠다”고 했다. 이어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는 “오늘 하루 사실 공표와 대책 마련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35번 환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자체가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나섰다면 정부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번 사태는 지자체에 의한 정부 부정(否定)이다.
서울시의 발표에 따라 다른 지자체도 2차·3차 감염자의 동선 확보에 나설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다수 감염자가 나온 경기도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보건 당국은 그동안 빠뜨렸다가 뒤늦게 발견한 2·3차 감염자 30여명의 행적 공백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이들이 만난 사람을 서울시처럼 전부 계산하면 수천, 수만명에 이를 수 있다.
문제는 다른 정부 부처들도 복지부 얘기를 믿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메르스 공포가 날로 커지고 있는 핵심적인 배경이다. 정부 각 부처가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므로 국민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건 교육부다. 교육부는 일선 학교의 휴업 조치를 지켜만 보고 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는 “예방적 차원에서 적극 검토한다”며 휴업을 독려하듯 발언했다. 정확한 메르스 정보를 학교에 전달하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1160곳이 넘는 학교 휴업은 메르스 공포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국방부도 복지부를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군은 지난달 말 메르스 환자 접촉 의심 병사가 있다며 관련 병사 30여명을 격리했다. 복지부가 그 병사는 역학조사상 감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지만 군은 듣지 않았다. 복지부는 결국 유전자 검사로 이를 증명해야 했다. 부처 간 불신 속에 예산과 시간이 낭비됐다.
이런 현상의 원인 제공자는 복지부다. 초기 대응 실패로 불신을 자초했다. 더 큰 책임은 정부 전체의 위기관리 능력에 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겪었음에도 위기 상황에서 전 부처를 아우르는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건 이처럼 정부 각 부처와 지자체가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함에 따라 메르스를 둘러싼 혼란과 공포는 더욱 커지게 된다는 점이다. 한 전문가는 “궁극적 책임은 국정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국민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 청와대에 있다”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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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6-05 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