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의 ‘지역사회 확산’이 현실로 다가왔다.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서울 대형병원의 30대 의사가 자택 격리 전까지 무려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메르스 대유행’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전문가들은 “결국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4일 서울시에 따르면 35번째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서울 상급종합병원의 외과의사(38)가 재건축조합 총회와 병원 심포지엄 등 대형 행사장에 수차례 드나들며 1500명이 넘는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했다.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에서 전임강사(펠로)로 일하는 이 의사는 지난달 27일 응급실에 입원한 14번째 메르스 환자(35)와 접촉했다. 그는 14번째 환자 옆 병상에 입원한 외상 환자를 진료하다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의사는 29일부터 가벼운 감기 기운이 시작됐고 30일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문제는 증상이 발현됐음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집으로 귀가해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는 점이다. 다음날 오전 9시~12시 병원 대강당에서 동료 의료인이 참여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했으며 오후 6시부터 1시간동안 서울 가든파이브의 식당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오후 7시부터 30분 동안 서울 양재동에서 1565명이 참석한 재건축조합 총회에 참석했다.
의료인으로서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인지하고도 가족은 물론 의료인 모임, 특히 다수가 모이는 장소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닌 셈이 된다. 이미 증상이 시작된 뒤이기 때문에 메르스 바이러스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의사는 31일에도 기침과 가래, 고열이 있었지만 오전 9시부터 1시간 동안 병원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몸이 좋지 않아 귀가했으며 그날 오후 9시 40분쯤에서야 국가지정격리병상이 있는 또 다른 대형병원에 격리됐다. 다시 말해 꼬박 3일 동안 보건당국의 아무런 격리조치 없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닌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중앙 방역 관리망이 뚫린 상황이다. 메르스 확산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엄중식 교수는 “지역 사회 확산은 이제 기정사실이라고 보면 된다. 메르스의 대유행 가능성이 커졌다.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 교수는 “상황을 봐야겠지만 전 세계적인 유행을 의미하는 ‘팬데믹’까진 아니고 지역사회에서 대유행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전망했다.
이로써 보건당국은 방역 체계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노출했다. 특히 초반부터 고집해 온 재택격리의 허술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거센 후폭풍이 예상된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안전 문제와 이들을 통한 환자의 추가 감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건당국은 말로는 감염이 의심되는 의료진에 대한 철저한 격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환자를 진료하거나 병원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실제 의료진 감염 환자 발생이 늘어나고 감염 환자들이 거쳐 간 병원도 증가하면서 보건당국은 감염 우려가 있는 의료진을 통한 추가 감염을 막는 데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현재 감염 환자가 거쳐간 병원은 14곳이었다. 하지만 의료현장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엄 교수는 “보건당국의 초기 방역 정책이 현장에서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서 “지금부터는 현재의 방역 인력으론 안되고 방역시스템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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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6-05 0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