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블라우스에 감색 점퍼 스커트 차림의 여학생이 미소 짓고 있었다. (중략) 단발머리에 하얀 얼굴, 볼우물이며 분꽃 씨앗처럼 까맣게 영근 눈동자가 영락없는 그 서울 애였다. 살아 있다면 지금 꼭 이럴 것이다.”
윤초시댁 증손녀가 죽고 중학교를 마친 소년은 도시의 공장에 취직한다. 외출한 동료가 팔에 웬 책을 끼고 방에 들어왔다. 옆 가발공장 여자 아이들이 보던 잡지였다. 고개를 빼고 잡지를 들여다보던 스물한 살의 소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년은 잡지를 몰래 찢어 주머니에 넣고는 접힌 자국이 닳을 때까지 꺼내보았다. 어느 날 빨래를 마친 작업복 주머니에서 흐물흐물 풀린 종이 부스러기가 흩어져 날아갔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황순원(1915~2000)의 단편 ‘소나기’의 에필로그를 소설가 이혜경은 이렇게 상상했다.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이란 제목을 붙은 그의 이야기는 다른 작가들이 상상한 후일담들과 함께 계간 ‘대산문화’ 2015년 여름호에 실렸다. 황순원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기획물이다.
구병모의 ‘헤살’은 어린 나이에 이별을 겪은 소년의 슬픔을 묘사했다. 소녀가 떠나고 며칠을 앓던 소년은 겨우 몸을 추스르고 학교에 나섰다가 결국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개울가에 주저앉는다. 소녀를 떠나보내려 물결에 헤살을 젓는 소년의 마음이 아련하다.
박덕규 단국대 교수는 ‘사람의 별’에서 색다른 판타지를 집어넣었다. 사실 소녀에게 소년과 관계는 자신의 죽음과 맞바꾼 위험한 감정이었다. 그 숨은 이야기를 지구를 떠난 별나라 소녀의 독백으로 풀어냈다.
전상국 김유정문학촌장의 ‘가을하다’에서는 소녀와 자꾸 중첩돼 떠오르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소년의 변화를 통해 사춘기 소년의 성장통을 그렸다.
서하진 경희대 교수는 소녀가 떠나고 3년 후, 소년이 학교에서 소녀와 너무나 닮은 전학생을 만나는 이야기에 ‘다시 소나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대산문화 신간에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강소천 박목월 서정주의 아들이 각각 아버지를 회상하는 글도 함께 실렸다.
김의구 기자 egkim@kmib.co.kr
"소녀가 떠나고 소년은 남았다" … 황순원의 '소나기' 그 애틋한 뒷 얘기는?
입력 2015-06-02 17:46 수정 2015-06-02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