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재난영화(disaster movie)’는 이처럼 클리셰가 양산될 정도로 확고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서부영화나 전쟁영화, 공포영화와 마찬가지로. 크게 자연재해(화산, 지진, 해일, 홍수, 혜성 충돌 등)와 인재(선박 침몰, 비행기 추락, 화재, 전염병의 창궐 등)로 대별되는 재난을 다룬 영화는 거의 영화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효시는 1906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The Fire!'. 주택에서 불이 나자 소방관들이 출동해 불길을 잡고 거주자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실제로 일어난 재난을 영화화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클라크 게이블과 스펜서 트레이시 양대 거물이 공연해 크게 흥행에 성공한 1936년작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에 일어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소재로 한 것으로 ‘샌 안드레아스’의 증조부 뻘 되는 영화였고, 이듬해 헨리 킹이 타이론 파워와 돈 아메쉬라는 역시 당대의 스타들을 동원해 만든 ‘인 올드 시카고(In Old Chicago)'는 1871년에 발생했던 시카고 대화재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그러니 타이타닉호의 침몰이라는 기막힌 소재를 당연히 영화계가 놓칠 리 없었다. 일찍이 타이타닉이 침몰된 바로 그 해인 1912년에 독일에서 ‘In Nachat und Eis(밤과 얼음 속에서)’라는 제목의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시작으로 1953년 진 네귤레스코 감독, 바바라 스탠윅, 로버트 와그너 주연으로 ‘타이타닉’이 만들어지더니 1958년에는 영국에서 ‘잊을 수 없는 밤(A Night to Remember)'이란 제목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7년에 제임스카메론이 또다시 ’타이타닉‘을 만들어 크게 흥행에 성공했다. 이밖에 타이타닉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선박의 침몰 및 좌초를 다룬 재난영화들이 속출했다. 이를테면 1960년에 앤드루 스톤 감독이 만든 로버트 스택, 도로시 말론 주연의 ’마지막 항해(The Last Voyage)'라든가 이 영화의 직접적인 손자뻘이 되는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 등이다.
‘포세이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로널드 님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70년대 재난영화의 중흥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론 실질적인 ‘중시조’는 1970년에 나온 조지 시튼 감독의 ‘에어포트’지만. 버트 랭카스터, 딘 마틴 등 올스타 캐스트가 출동한 이 영화의 흥행성공을 기점으로 72년 ‘포세이돈 어드벤처’, 74년 ‘대지진’과 재난영화의 결정판이라 할 ‘타워링(Towering Inferno)’이 줄줄이 이어졌다. 특히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에어포트’는 1974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부’ ‘러브스토리’ ‘사운드 오브 뮤직’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히트한 6대 영화’로 꼽혔으며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타워링’을 제작한 어윈 알렌은 ‘재난영화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매너리즘에 빠진 재난영화는 잠시 주춤해졌다가 컴퓨터 그래픽 등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과 특수효과에 대한 영화사들의 아낌없는 투자로 인해 1990년대에 부활했다. 즉 1996년 토네이도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트위스터’가 나오더니 97년에는 화제작 ‘타이타닉’ 외에 화산 폭발을 다룬 ‘볼케이노’와 ‘단테스 피크’가 한꺼번에 개봉됐다. 하지만 같은 ‘화산 영화’라도 스펜서 트레이시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명연기가 빛을 발했던 1961년작 ‘4시의 악마(Devil at 4 O'clock)'가 더 기억에 남는다. 비록 특수효과는 떨어지지만.
왜 그런가. 배우들 때문이다. 재난영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추세가 눈에 띈다. 원래 재난영화는 스펙터클보다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다보니 스토리와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호화 캐스트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갈수록 특수 효과 및 컴퓨터 그래픽에 더 많은 관심과 돈을 쏟게 되면서 스타들을 기용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버트 랭카스터와 딘 마틴 외에 반 헤플린, 헬렌 헤이스, 재클린 비세트, 진 세버그 등이 총출동한 ‘에어포트’와 진 해크먼, 어네스트 보그나인, 셀리 윈터스, 레드 버튼스, 로디 맥도웰 등이 포진한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타워링’ 역시 폴 뉴먼에 스티브 맥퀸이라는 당대 최고의 거물 스타들뿐 아니라 윌리엄 홀든, 프레드 아스테어, 페이 더나웨이, 제니퍼 존스 등 올스타 캐스트였다.
또 캘리포니아의 지진을 소재로 함으로써 ’샌 안드레아스‘의 직계 조상이 되는 ‘대지진’ 역시 찰턴 헤스턴, 에바 가드너, 쥬네비에브 뷰졸드, 론 그린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화면을 메웠다. 이에 비하면 요즘 재난영화들은 배우들 보는 맛이 영 없다. ‘샌 안드레아스’의 경우 드웨인 존슨--그나마 우람한 몸집 외에는 이렇다 할 게 없는 사나이--말고는 눈길을 끄는 스타 한 명 없으니 참으로 심심하달 밖에.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