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장로 칼럼-종교인과 신앙인(117)] 여명의 빛

입력 2015-05-26 15:27

조선 말기, 당시는 우리 민족 암흑기의 끝자락이었다. 그때 조선은 세계정세에 무지한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양반은 백성을 무시했고 민초들은 문맹으로 평생 살아야 했다. 한글은 있었으나 우리글을 무시하는 풍조로 인해 우리 자신이 한글의 보급과 발전을 막았다.

그 때 중국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 선교사는 1874년 중국 봉천(현 선양)에서 조선인을 만난 것을 계기로 성경의 한글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한글을 배우고 활자를 스스로 만들었으며, 성경을 번역해 최초의 한글 성경을 만들었고 이렇게 인쇄된 한글 성경이 국내에 유입되었다.

하나님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보낼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서 준비시키시고 그들의 마음을 조선으로 향하게 하셨다.

1883년 견미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의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은 대륙 횡단 열차에서 감리교의 존 가우처 목사를 만났다. 당시 조선은 선교 금지 구역이었다. 너무나 심한 쇄국정책으로 선교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 가우치 목사는 거액의 선교 헌금을 감리교단에 내고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1883년 미국 신학교 학생이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의 소망을 갖고 기도하던 중 조선 선교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오하이오 주에서 한 여인이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면 그 일에 써달라”며 그동안 모았던 돈을 헌금한 것이다.

188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호러스 뉴튼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 의사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착실히 준비하고 계셨다. 1882년과 1884년 사이에는 조선 선교의 시작을 위한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곳곳에서 선교사들의 마음이 조선으로 향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역사적인 만남과 사건들이 이어졌다.

1885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00명의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왔다. 아프고 억압받고 차별 받던 시기, 그리고 일본의 식민 통치 시기를 겪은 우리에게 의술, 복음, 사회개혁, 독립운동, 한글보급, 학교설립 등의 새 길을 열었다.

1885년과 1886년, 제중원과 정동병원이 서울에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선교사들은 1910년까지 전국 26개 지역에 29개 기독병원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의료의 기초를 놓았고 우리 민중은 생명의 젖줄을 찾았다.

선교사들은 또한 세계 흐름에 둔감하던 조선이 대외적으로 위기를 겪을 때마다 조선을 세계에 알렸고 우리의 자주 독립의 의지를 세계 만민에게 알렸다. 3.1운동의 주역을 기독교인들이 맡음으로써 절망하던 조선인들은 기독교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했다.

또 인권이 무시됐던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을 보아온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양돈과 양계 기술을 가르쳐 독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듦으로써 소외된 자들에게 빛을 주었고 그 축산 기술이 한국 농민들에게 전파되어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기반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장로교 선교사로서 경신학교를 세웠고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세움으로써 학교를 통한 선교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또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선교사는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했으며, 학교 내 출판사를 세워 독립신문 발행을 적극 지원했고, 성경 번역 위원회를 통해 한글의 문법과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묘원에 있는 그의 추모비에는 그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의 기도문이 적혀 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여명의 빛,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빛이었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깨닫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