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남미 엘살바도르에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다가 1980년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23일(현지시간) 가톨릭 교회의 복자(福者) 지위를 얻었다. 이로써 남미의 우파 정치 진영과 바티칸의 보수파 진영에서 ‘게릴라 신학’으로 비판해온 로메로 대주교의 ‘해방신학’이 가톨릭 사회 내에서 정격 신학으로 거듭나게 됐다.
복자는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공적으로 공경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존칭으로, 성인의 바로 전 단계 지위다. 영국 BBC 방송은 “이로써 성인이 되기 전의 모든 과정을 거치게 됐다”고 밝혀 향후 성인으로 추대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엘살바도르 가톨릭 교회는 23일(현지시간)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기념식을 열고 로메로 주교가 복자 지위에 올랐음을 공식 선포했다. 기념식에는 남미 각국에서 온 25만 명 이상의 교인과 시민들이 참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명을 통해 “로메로 대주교가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이번 시복이 과거 사건들에 대한 진실 규명과 당사자들간 화해가 이뤄지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인물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군사정권의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암살과 고문 사실을 폭로했고, 미사가 열릴 때마다 불의에 저항하라고 설교했다. 1980년 3월 24일 미사 도중 총에 맞아 암살당했을 때에도 “신의 이름으로 간청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억압을 중단하십시오. 하느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며 그 어떤 누구도 살인을 명령할 수 없다”고 외쳤다. 암살 사건 이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으나, 엘살바도르 정부는 2010년에 그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바 있다.
종교인의 정치개입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았지만, 로메로 대주교의 ‘불의에 저항하라’는 정신은 기념식에서도 거듭 정당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앙겔로 아마토 주교는 기념식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목소리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복음이었다”며 “로메로의 정신은 지금에도 살아 있으며 한계상황에 내몰린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BBC 방송은 “남미에서는 과거 70~80년대 로메로 대주교와 함께 했던 이들 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도 로메로 대주교를 존경하고 있다”고 전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
로메로 대주교 복자 지위,불의 저항 위한 종교인 정치 개입 평가
입력 2015-05-24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