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제2의 임흥순 꿈꾸며˝… ´금천예술공장´ 젊은 작가들의 끼와 열정을 보다

입력 2015-05-24 18:00
사진=‘제2의 임흥순’을 꿈꾸는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들이 지난 20일 공동작업실 입구에서 포즈를 취했다. 앞에서부터 연기백, 김세진, 리오 샴리즈, 박광수 작가. 2009년 10월 개관 이후 현재까지 25개국 230여명의 작가가 이곳을 거쳐 갔다. 곽경근 선임기자

서울 금천구 독산역(驛)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 옛 구로공단의 일부여서 지금도 인쇄소, 금형공장, 도색공장 등이 즐비한 범안로 15길에는 ‘무명작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곳이 있다.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레지던시 ‘금천예술공장’이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임흥순(46) 작가가 여기 출신이다. 지난 20일 이곳을 찾아 ‘제2의 임흥순’을 꿈꾸는 끼와 열정 넘치는 젊은 작가들을 만났다.

◇혼자 그리고 함께=서울대 조소과 출신 연기백(41) 작가의 작업실은 간이침대와 싱크대까지 갖춘 49.5㎡(15평)의 꽤 넓은 공간이었다. 이곳 19개의 작업실은 5, 7, 12, 15평 네 종류가 있다. 오른쪽 구석에 목재소 마냥 3m가 넘는 나무기둥을 무더기로 세워 놓은 게 눈에 띈다. 이곳 입주작가로 선정되기 전엔 성북동의 개량 한옥에 개인작업실이 있었다는 그는 “그땐 손을 뻗치면 천장이 닿을 정도였다. 저처럼 설치작업을 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높고 탁 트인 공간이 작업의 생명”이라며 웃었다. 얼핏 어지럽게 보이지만 정연하게 쌓아둔 벽지, 기와, 빨래판, 장판 등이 작업 재료다. 10월에는 낡은 집에서 뜯어낸 장판을 활용한 설치작업으로 전시를 한다.

박광수(31·서울과기대 졸업) 작가는 “개인 작업실은 혼자만의 공간이다. 이곳에선 여러 작가가 모여 있다보니 다른 작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작업을 하는지 경향을 파악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붓으로 풍경 드로잉을 하는 그의 작품은 이곳 레지던시의 지원을 받아 미국 평론가의 비평도 받을 수 있었다. ‘영어 비평’은 국제무대로 진출을 시도할 때 유용하다.

◇레지던시는 영감의 원천=미디어아트를 하는 김세진(44·여·영국 UCL 대학) 작가는 홍콩, 대만 등의 해외 레지던시 경험이 많다. 대만에 있을 때 ‘필리핀 가정부’ 등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된 걸 목격했다. 이주노동자를 다루는 현재의 영상작업은 그때의 경험이 계기가 됐다. 금천예술공장은 해외작가도 지원한다. 이스라엘 출신 영화감독 리오 샴리즈(37)는 2013년에 이어 올해 ‘재수생’이다. 2013년 체류 당시 예수정 원태희 등 한국 배우를 캐스팅해 서울에서 찍은 저예산 영화 ‘공백의 얼굴들’은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주인공으로 청년 노동자가 나온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인근 공단의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 등이 놀러 오신다. 금천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외 작가가 섞여 서로 다른 시각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이곳의 혜택이다.

◇금천예술공장만의 특성은=지역 주민과의 연계 예술프로그램이 강점이다. 주민들에게 작업실을 공개하는 오픈 스튜디오, 고고생 대상 ‘작가와의 1박2일’, 입주 작가가 중·고교생이나 주민과 함께 하는 창작 프로그램 등 다채롭다. 2011~2012년 연속 입주작가로 선발됐던 임흥순 작가는 금천지역 주부 19명으로 구성된 ‘금천 미세스’와 함께 영화를 찍었다. 과거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자신의 이야기, 가족을 위해 ‘공순이’로 희생했던 언니에 대한 미안함 등 개인사를 녹인 시나리오와 함께 옴니버스식 영화 ‘금천 블루스’가 탄생했다. 금천예술공장의 커뮤니티아트프로젝트에 당선된 이 영화는 1700만원의 별도 지원을 받았다. 임 작가의 은사자상 수상작 ‘위로공단’은 ‘금천 블루스’와도 닿아 있는 셈이다.

김희영 금천예술공장 매니저는 “임 작가는 지독하게 열심히 작업했던 사람이었다. 작업실에서 매일 숙식하다시피 했다”며 “이곳의 영상 편집기, 캠코더, 녹음시설도 가장 많이 빌려 썼다”고 기억했다. 박광수 작가는 지난해 가을 인근 동일여고 학생 8명과 함께 그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은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 장면을 가지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그는 “세월호 사건 후 교복 입은 학생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이 생겨 뭔가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9년 설립된 금천예술공장은 서울시 산하 9개 예술가 지원 레지던시 중 하나다. 입소문이 나면서 한국 작가(1년 지원)는 20대 1, 해외 작가(3개월)는 4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입주할 수 있다.



레지던시는…

미술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개인적 능력 못잖게 생계 문제와 창작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다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레지던시는 전업 작가로 자리 잡기까지 과도기적 고민을 덜고 마음 놓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무료 또는 실비로 제공되는 작업공간을 말한다. 지역 연계 활동, 해외 교류, 비평가 연결 등 부가지원 프로그램도 있다. 예술정책 차원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로 운영하지만 민간 레지던시도 있다. 국내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는 서울 ‘창동 창작 스튜디오’ 등 전국에 120여 곳 이상 운영 중이다. 과거 ‘국전(國展)’이 작가로 출세하는 등용문이었다면 국전 폐지 후에는 각종 미술상과 함께 어느 레지던시 출신인지 역시 작가의 중요한 이력이 되고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