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20.배우의 키

입력 2015-05-18 14:21
영화 ‘당당하게’(Tall in the Shaddle·1944)에서 엘라 레인스와 열연 중인 존 웨인. 국민일보DB
우연히 영화촬영 현장을 지나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후 촬영이 끝나고 흩어지는 구경꾼들 속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야! 진짜 기럭지가 장난 아니네!” 보통 말로 옮기자면 “정말 키가 크구나”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촬영장에 나온 젊은 남자배우는 대단히 키가 컸다. 마치 왕년의 할리우드 배우들을 연상시켰다.

황금기 할리우드 배우들은 미남 호남이었을 뿐 아니라 키까지 컸다. 웬만한 농구선수 뺨치게 190㎝를 넘기는 이들도 흔했다. 존 웨인은 193㎝(록 허드슨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라이언, 그리고 악역 전문 잭 팰런스도 같다)였고 제임스 스튜어트와 찰턴 헤스턴이 191㎝, 게리 쿠퍼와 그레고리 펙은 190㎝였다. 또 그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숀 코너리가 189㎝, 버트 랭카스터와 리 마빈, 에롤 플린, 피터 오툴, 마이클 케인, 진 해크먼과 제임스 코번이 188㎝, 케리 그랜트와 헨리 폰다가 187㎝, 클라크 게이블이 185㎝나 됐다.



하지만 예외도 없지 않았다. ‘셰인’으로 유명한 앨런 래드는 불과 168㎝여서 키 큰 여배우들과 키스신이라도 찍을 때는 상자 위에 올라서서 신체 윗부분만 찍었다는 전설을 남겼고, 거친 갱스터 역할로 일세를 풍미한 제임스 캐그니 역시 그 강렬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키는 165㎝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사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0대의 우상’으로 회자되는 제임스 딘은 간신히 170은 넘겼지만 173㎝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이들처럼 단신은 아니지만 생각 외로 키가 크지 않은 배우들도 많다. 예컨대 누구나 넘버 원 터프가이로 인정하는 험프리 보가트는 174㎝로 평범한 중키였고, 남성 호르몬이 넘칠 것 같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 각각 콧수염과 대머리로 이름 높은 찰스 브론슨과 율 브리너도 174, 173㎝였다. 더 의외인 건 말론 브랜도와 커크 더글러스다. 각각 대부와 스파르타쿠스의 이미지로 더 깊이 각인된 이들은 얼핏 거인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제 키는 한국 남자의 평균 신장을 약간 웃도는 175㎝에 지나지 않는다. 실베스터 스탤론도 그보다 겨우 2㎝ 더 큰 177㎝이니까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작은 키는 아니지만 마치 골리앗처럼 생각되는 ‘람보’나 ‘록키’와는 딴 판이다.



요즘도 제임스 딘보다 더 키가 작으면서 더 활약하는 배우들도 있다. 톰 크루즈와 알 파치노. 둘 다 170㎝다. 167㎝의 더스틴 호프만도 있지만 그는 적어도 액션배우는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자. 하지만 크루즈와 파치노는 다르다. 둘 다 선이 굵고 액션연기도 활발하게 한다. 겨우 170㎝ 밖에 안 되는데도 화면에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키가 작다든가 몸집이 왜소하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다. 특히 최근 영화 ‘잭 리처’에서 범죄사냥꾼 잭 리처 역할을 연기한 크루즈의 경우 리 차일드의 원작소설에서 리처는 거구로 묘사되지만 영화에서 리처로 나온 크루즈는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연기나 카리스마로 신체적 불리함을 충분히 만회하고 있다는 얘기다.

배우가 되려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보통 젊은이들까지 큰 키에 목을 매는 게 요즘의 세태지만 설혹 키가 작다고 해도 키 외의 다른 것, 이를테면 성격이라든지 능력 등으로 얼마든지 작은 키를 커버할 수 있음을 톰 크루즈와 알 파치노는 보여준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