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주흘산에 머문 봄은 역사의 길을 따라 꽃을 피우고

입력 2015-05-14 22:35

[사진설명] 경북 문경 주흘산에서 만난 봄 야생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삼색병꽃나무꽃, 금괭이눈, 빗살현호색, 참꽃말이, 회리바람꽃, 으름덩굴, 제비꽃, 미나리냉이, 노랑제비꽃, 각시붓꽃, 산초나무꽃, 홀아비바람꽃, 토종민들레, 개별꽃, 주흘산 주봉 인근 피나물 군락지 / 문경=구성찬 기자


백두대간 칼바람이 매섭게 지나가면서 마지막 남은 벚꽃, 복사꽃 꽃잎이 휘날린다. 분홍빛 꽃잎 아직 선연한 흙길 옆으로는 홀아비바람꽃, 피나물, 노란제비꽃, 벌깨덩굴 등 봄철 야생화가 거센 바람의 훼방을 물리치고 색색의 꽃 융단을 깔아놓았다. 5월초 황금연휴의 막바지인 지난 4일, 경북 문경시 주흘산(1106m) 주봉(1076m) 근처였다. 주흘산은 야생화 애호가들이 손에 꼽는 명소 중 하나다. 특히 이른 봄부터 초여름 고산지대를 수놓는 바람꽃 종류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등산은 문경읍 문경새재 진입로에서 1관문(주흘관)~혜국사~주봉~2관문(조곡관)~1관문 코스를 택했다. 환경부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식물분류사인 박대문(전 수도권매립지공사사장) 시인이 동행했다.

◇ 온갖 인간 군상이 오갔던 역사와 문화의 통로
넓은 새재 길을 벗어나 혜국사 쪽으로 향하니 매화말발도리, 병꽃나무, 으름덩굴 등의 관목(떨기나무)이 꽃을 피웠다. 으름덩굴은 암수한그루로 아래쪽에 달리는 자홍색의 암꽃은 밑 부분에 달려 있다. 박대문 씨는 “으름덩굴 꽃이 눈에 잘 안 띄지만 가까이 보면 매우 예쁘고 근접촬영의 효과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일행이 모두 카메라를 들었으니 발걸음이 자꾸 늦춰진다.
사실 5월초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좋은 계절이다. 그렇지만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문경새재와 주흘산은 각별하다.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嶺)로 조선시대 옛길(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높은 고갯길이다. 낙동강 문화권과 한강 문화권을 잇는 지름길이자 전략적 요충이다. 조선시대의 경부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문경새재는 난리를 피해가는 왕, 부임하는 고위관료, 파발, 과거 보려는 수험생, 행상 등 온갖 인간 군상이 오갔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진격로이기도 했지만,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이 거치는 길이기도 했다.
동쪽에서는 주흘산(1075m)이, 서쪽에서는 백두대간의 한 축인 조령산(1026m)이 문경새재를 감싸고 있다. 두 산 모두 등산 매니아들이 즐겨 찾는 명산이다. 특히 주흘산은 다양한 나무와 야생화, 백두대간이 펼쳐지는 주봉에서의 뛰어난 조망 등이 일품이다. 문경새재는 평탄하고 넓은 탐방로, 그것과 대비되는 주변의 1000m급 높은 산들, 주변의 숱한 유적들과 풍부한 스토리텔링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2013년 한국관광공사의 설문조사 결과 전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관광지 1위로 꼽혔다.

◇ 녹음의 향연 속에 펼쳐진 야생의 화원
등산로 주변으로 콩제비꽃, 졸방제비꽃 등 제비꽃종류 가운데 일부가 지지 않고 남아 있다. 가장 흔한 제비꽃 종류는 대략 60가지로 이른 봄부터 초가을까지 산과 들을 장식한다. 미나리냉이, 미나리아제비, 윤판나물, 애기나리의 꽃들도 보인다. 윤판나물의 꽃받침이 지리산 주변의 귀틀집을 일컫는 윤판집 지붕을 닮아서 윤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꽃이 아래를 향해 달리는 등의 겉모습이 둥굴레나 애기나리와 비슷하지만, 윤판나물의 꽃은 황금색인 반면 둥굴레 꽃은 흰색에 끝이 녹색, 애기나리 꽃은 연한녹색이다.
혜국사는 고려말 홍건적의 난 당시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신하다가 잠시 몸을 의탁했던 곳이다. 원래 명칭은 법흥사였지만, 개성으로 돌아간 공민왕이 보답으로 재물을 하사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인 혜국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봉우리 사이에 묻힌 사찰과 그 주변에서 보이는 경치는 활엽수와 침엽수가 뒤섞여 그려내는 연두빛과 녹색의 향연이다.
혜국사에서 주봉까지는 본격적인 산행이다. 산죽들이 꽃을 피웠다. 꽃을 피우면 그해 죽는다. 솜털 같은 흰 꽃을 피운 좀쇠물푸레, 올괴불나무, 꼬리진달래 등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들을 만났다. 해발고도가 높아지자 꽃이 막 달리기 시작한 용둥굴레, 참개별꽃, 빗살현호색, 노란제비꽃, 산괴불주머니, 홀아비바람꽃 등이 나타난다. 노란제비꽃은 낮은 지대에서는 이미 지고 없다. 샘터가 있는 대궐터에 도착했다. 해발 850m인 이곳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20여 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넓지 않은 공터에 요즘 보기 힘든 토종 민들레가 많이 피어있다. 박 시인은 “우리 민들레는 노란 꽃의 꽃받침이 꼿꼿한 반면 서양민들레는 꽃받침이 아래로 처져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봉에 이르기 직전 동그란 자주색 꽃 모양이 족두리를 닮은 족도리풀이 보인다. 꽃대가 꺾이는 금강제비꽃, 큰애기나리, 꽃이 지고 없는 처녀치마와 꿩의다리아재비도 나타났다. 주봉은 주흘산 정상인 영봉보다 낮지만 조망이 더 뛰어나다. 남쪽으로 문경읍내와 백화산,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을 이루는 부봉과 포암산, 대미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월악산과 소백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늦게까지 피어 있는 진달래꽃이 영봉 3거리 이정표 옆에 서 있다.

◇ 인간세상의 가버린 봄이 옮겨온 곳
하산길은 조곡(鳥谷)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홀아비바람꽃과 노란 꽃을 피운 피나물 천지다. 이 곳에서 바람꽃들을 많이 관찰할 수 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지만, 홀아비바람꽃 이외에는 회리바람꽃 몇 송이만 볼 수 있었다. 회리바람꽃은 조그만 노란 꽃이 마치 회오리를 일으키듯 모여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박 시인은 “나도바람꽃 정도는 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높은 산에서만 서식하는 바람꽃은 종류가 10여종으로 많지 않은데다 개화기간이 열흘 정도로 짧아서 제때에 관찰하기가 어렵다.
돌길 너덜지대를 지나면 ‘꽃밭서들’로 불리는 돌탑 무더기 언덕이 눈길을 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소원을 빌었을까. 꽃밭서들의 진달래꽃은 다 지고 없지만, 계곡을 가리고 피어 있는 귀룽나무 흰 꽃이 반갑다. 다른 장미과 꽃나무들이 거의 다 꽃을 떨군 후라 더욱 애틋하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가 떠오른다. ‘인간세상 사월엔 꽃들 모두 졌는데/ 산사의 복사꽃은 이제 막 한창일세/ 가버린 봄 찾을 길 없어 늘 한스러웠는데/ 이곳으로 옮겨온 줄 모르고 있었네’ (대림사 도화)
어느덧 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했다. 박달나무, 느티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1관문까지 내려가는 길은 많은 가족단위 인파 속에 공원에 산책 나온 듯한 느낌이다. 조선시대에는 험한 고개였다지만, 구불구불하고 좁은 옛길을 직선으로 넓힌 덕에 ‘신작로’가 됐다. 그렇지만 문경새재는 무엇보다도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는 게 중요하다. 조선시대 한양과 영남을 잇는 고개 가운데 죽령이나 이화령과 달리 문경새재가 흙길로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자 축복이다. 이 참에 이화령 포장도로도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옛길을 복원하도록 하자.
문경=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