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대표적 강해설교가인 박영선 남포교회 목사와 설교비평가 정용섭 대구성서아카데미 목사가 설교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이들은 11일 서울 광진구 광장로길 장로회신학대(장신대) 소양관에서 열린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설교의 정의와 중요성, 설교자와 신학, 설교의 위치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사회는 장신대 윤철호(조직신학) 교수가 맡았다. 다음은 대담 전문.
-설교에 대한 정의가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설교가 무엇인가요?
△박영선 목사=우선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신학을 하고 있고 설교를 하려는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볼 때 설교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기대, 그리고 현실의 괴리 속에서의 ‘비명’입니다. 이 비명은 증언이나 설명, 교훈일 수도 있습니다. 기대와 다른 현실로 인한 몸부림이 설교를 터져 나오게 합니다.
△정용섭 목사= 비명이란 말이 가슴에 꽂힙니다. 설교는 정말 ‘악’ 소리 나는 경험입니다. 이는 성서 저자들의 공통된 경험이기도 합니다. 설교는 무한적인 성서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고도 했는데 이처럼 막막하고 신비한 일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 정리해서 말하자면 설교는 ‘청중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언어 행위’입니다.
-비명과 신비라는 말로 대비가 됩니다.
△박 목사= 대다수 설교자는 자신이 뭘 잘 하는지 모릅니다. 할 줄 모르는데 진지하게 하면 비명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정 목사의 신비에 관한 설명과 이해는 경이, 또는 모순과 한계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설교자는 비관적인 사람, 낙관적 사람이 있는데 저는 비관적인 편에 속합니다. 한계와 모순을 더 많이 느껴서 비명을 지릅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박 목사=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유언으로 남긴 말 중 하나입니다. 너희 중에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리라. 즉 설교자는 청중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청중과 동일한 시대, 현실과 위협, 공포와 의심 속에 있는 사람이 강단에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를 부른다는 것은 신자 전체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책임 있는 현실로 서는 것, 청중보다 우월하려고 하거나 완벽하려고 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정 목사= 사실 저는 그런 지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교자는 성서에 놀라고 (성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연을 촘촘히 읽어내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설교자는 일단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를 경험해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이는 텍스트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성서를 맛봐야 합니다.
-그러면 설교자는 누구입니까.
△박 목사= 하나님이 세운 자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라고 세운 자입니다. 인간들을 대신해 솔직한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겐 이런 양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쪽 편에 있다가도 저쪽 편에 서기도 합니다.
△정 목사= 설교자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가이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설교자즌 바둑의 기보를 해설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둑판에 흰 돌과 검은 돌이 놓여지는 과정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해설을 하려면 바둑을 잘 알아야 합니다. 프로9단의 바둑을 9급자가 해설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같은 수준이면 바둑의 세계를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서의 세계는 우주와 같이 무한한 세계입니다. 설교자는 그 세계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둑을 둔 다음 그대로 다시 두는 것을 복기라고 하는데요. 이는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과 기독교 영성의 고유한 길을 찾는 게 설교자입니다.
-설교에서 신학은 왜 필요합니까.
△박 목사= 저의 신앙의 전제는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예수 믿은 다음 살아야 하는 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은 성화 과정 속에 있는데 운명이나 명분 등으로 대체돼 현실을 사는 것에 시선을 뺏깁니다. 왜 기대하는 것처럼 (성화적 삶을) 살 수 없는가 하는 것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아무리 신앙의 정성을 기울여도 되지 않아서 실패와 절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질문이 생겨났는데 도대체 신학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중요한 인식이나 특권으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을 조종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시고 납득시킨다는 것입니다. 학문 자체는 (어떤 일을) 창조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정리하며 분별하여 안목을 가지게 합니다. 신학을 논할 때마다 창조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다른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순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고 의도치 않은 설교가 청중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 이 얼마나 모순이고 놀라운 현실입니까. 저는 1982년 서울 남서울교회 부목사로 들어가서 강대상에 올라 분노했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난 기독교 내세론, 결과론에 집착한 전도와 부흥에 치를 떨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설교에서 표출했습니다. 그래서 은혜 대신 저주하다시피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이 됐다는 겁니다. 저는 교인수가 증가하는 것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치면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나중에 보니 제가 유익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았고 철도 없었는데 성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부흥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을 경험한 분들이 신학교에 와서 설교하면서 신학이 무슨 소용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신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부작용을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 목사= 저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게 화두입니다. 그게 신학을 하게 만듭니다. 삶의 적용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서의 텍스트가 중요한데 그 전에 신학이 있는 것입니다. 텍스트보다 신학이 먼저였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저자들이 신학적 관점이 없었다면 성경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학은 경험입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는 것은 경험이되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언어로 풀어놓은 게 성경입니다.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요.
△박 목사= 설교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설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배에 임재하시며 그의 권위가 선포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에게 말씀을 증언케 함으로써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증언이 너무나 생생한 현장이 바로 설교의 위치입니다.
△정 목사= 설교와 목회는 밀접하지 않습니다. 목회와 관련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설교와 예배의 관계에서 설교가 예배 안에 있어야 적절한 역할을 생각해야 합니다. 개신교의 경우 설교가 과대 포장된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 안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에 따라 설교의 무게도 조정해야 합니다. 탁월한 분은 설교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목회자에게 설교도, 목회도 잘하는 것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설교가 약하다면 예배만 잘 인도하도록 역할을 축소하면 어떨까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예배는 예전 중심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 목사= 목회자들은 설교를 멋있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식에게 매끼 밥을 준다고 생각하십시오. 자녀는 보약이 아니라 엄마가 해주는 밥과 반찬으로 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깊이 파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주제설교를 많이 하는데 주제설교는 대가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저는 강해설교를 하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는 성경이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자식들을 키우실 것입니다.
정리=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설교는 ‘악’ 소리 나야한다…강해설교가 vs 설교비평가의 대담
입력 2015-05-11 18:41 수정 2015-05-11 2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