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선을 행하는 용기

입력 2015-05-11 11:02

오늘날 신용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가의 신용도가 떨어지면 국가가 경제위기를 맞게 됩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IMF를 만나게 된 이유도 국가신용도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유럽의 국가들이 신용도가 떨어져 경제위기를 만나 고생을 합니다. 어떻게 신용을 회복해야 할지 관건이지만 국민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용을 회복시키기 위한 고난을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신용이 떨어져 신용불량이 걸리면 대출도 되지 않고 카드는 한계는 줄어들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경매에 넘어가고 마침내는 부도가 납니다. 빚더미에 앉아있는 사람은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다 다시 힘 한번 펴지 못하고 인생이 주저앉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신용사회입니다. 국가나 회사나 개인이나 모두가 빚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빚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용이 있을 때에는 빚을 빚이라고 여기지 않고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국가, 회사, 개인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모든 국가나 은행으로 부터 빚 독촉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잘 대처하면, 그나마 신용관계를 잘 맺어놓은 곳이 있으면 조금씩 연장을 해가면서 상황을 잘 극복 해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신용불량에 걸려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부채가 있었습니다. 큰 교회들의 여러 가지 사고, 사건들이 교회의 신용을 급락시켰습니다. 거기에 교인들이 생활하는 삶의 모습들이 교회의 신용을 강등시켰습니다. 신문에 나는 큰 기사의 사건들에 연루 되어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장로들입니다. 목회자들입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교회가 낫지 생각하고 교회의 신용을 세상보다는 나은 평가를 두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교회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신용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때 교회가 신용회복을 시키지 못하면 교회는 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고 맙니다.

교회의 신용등급은 돈이 아닙니다. 교회의 신용등급은 선한 일, 착한 행실입니다. 교회의 신용등급은 세상과 다른 남다름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신용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에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통하는 것처럼 믿음을 내세우지만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과 너무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음은 교회신용을 강등시키는 일이 되었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새 학기가 들어서 학교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학교에 다녀온 딸에게 엄마가 물었습니다. “애야 학교에서 너희 반 아이 가운데 어려운 아이가 있더냐? 가장 어려운 아이가 어떤 아이냐?”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반에 남자아이가 있는데 엄마! 옷도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 그리고 양말도 다 떨어진 것을 신고와. 엄마하고 사는데 엄마가 식당에 가서 일하고 있는데 매일 늦게 온데.”

“그래! 그러면 앞으로 그 아이에게 잘 대해주거라. 네가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렴” 엄마의 말을 듣고 조금은 더럽고 지저분한 아이와 가까이 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그 친구만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다가 나도 왕따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친구와 가까이 하고 양말도 가져다주고 가까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다른 친구들도 이제는 그 아이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아이들이 다 그 아이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가 큰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 속에서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착한 일을 할 때에 사람들은 선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착한 일을 하다보면 나만 세상에서 바보가 된 느낌을 받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나만 세상에서 뒤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정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고 착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도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 속에서도 착한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교회가 세상에서 신용등급을 높이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똑똑해지고 커지고 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교회가 착한 이웃으로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신용을 다시 회복시켜야 할 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이웃으로 사람들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 20일 동안 금식기도하며 하나님께 “하나님 왜 제가 개척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20일 동안 거의 같은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 이런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를 정리했습니다. 정리한 내용은 “정말 하나님을 위하는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내 교회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교회의 표어를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보다 내일에, 작년보다 올해에 올 해 보다는 내년에 더 큰 영광을 위해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로 했습니다.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매달리기로 했습니다. 38평의 지하교회를 시작하면서 어느 교회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정기적인 선교비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도와주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만나로 살고 이끌고 가기로 작정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교회의 필요를 삶의 필요를 늘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늘의 만나로 늘 먹여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국내와 해외에 그리고 교회로 하여금 넉넉하게 더 많이 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둘째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건축하는 목사가 아니라 목회하는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목회하는 목사로서 교회는 거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교인들을 교회로 대했습니다. 목사님들의 목회 방법은 각자가 다 다릅니다. 부르심의 사명도 방법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심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짓고 사람을 모으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서 성도를 온전한 교회로 세우게 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성도들을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놀랍게도 저에게 교회 부지도 허락하시고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셋째는 나를 위해서 교인들이 나와 주는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 교회 부흥을 위해서 교인들이 멀리 이사를 가도 한 달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주일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교회를 나와 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감정을 자극하고 감정에 호소하여 교인들을 교회에 붙들어 놓는 방법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무엇이 정말 하나님을 위해 유익한 일인지 더 나은 예배 봉사 섬김을 위해서라면 교인들을 언제든지 보내주어야 하는 목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교인들과 친해서 친한 인간관계가 리더십이 되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사람들을 잘 다루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일 때 목사의 눈치를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일하는 사람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은혜로 지금까지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오면서 참으로 많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세운 원칙을 포기하고 싶은 갈등입니다. 선교하고 도와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 연합 사업을 위해 노회나 기관을 도와주기 위해 일을 하다 보니 손 벌리는데도 많고 교회는 작은데 얼마 하지도 않으면서 이제는 단골 메뉴처럼 늘 손을 벌려 힘들어 질 때는 부담을 느낄 때는 이제는 정말 그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의 고민을 할 때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건축하는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을 교회로 세우겠다는 원칙도 흔들립니다. 그 때 교회를 더 크게 지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교회를 조금 더 크게 건축을 해 볼까? 그러면 교인들의 모이는 숫자가 늘어나지 않을까 사람들이 큰 교회라고 나를 좀 더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고민으로 늘 교회를 지었다 부셨다 하는 고민을 아직도 반복합니다.

또한 교인들로 하여금 멀리 이사를 가도 새벽기도회는 그곳에서 가더라고 주일만큼은 이 교회로 와야 한다고 윽박을 질러서라도 이 교회로 나오게 해야 하지 않나? 교인들이 이 교회에 와서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 한 푼이라도 더 하도록 해야 교회가 더 잘 세워지고 사람들도 많은 교회처럼 보여 지지 않을까?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떠나면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이사를 가면 교회를 떠날 것이고 그러면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의 갈등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를 돕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그렇게 리더십을 발휘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올 인하게 만들고 그러면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칭찬하고 격려해서 칭찬에 익숙한 교인들로 만들까 하는 고민과 갈등입니다.

그러나 늘 본질을 생각합니다. 목사의 유익을 위함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함인가? 목사의 자랑과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직도 이런 본질의 싸움을 반복하는 것을 보니 나는 목회의 초년병 같은 목사임에 분명합니다. 끝임 없는 인간의 욕심과 자랑을 버리지 못하는 세상적인 것에 여전히 매달리는 목회자로 서 있는 모습이 때로는 안타깝습니다.



대전 서구기독교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