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제시해 맑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정치지도자 그룹들이 줄줄이 부패로 몰려 검찰청사 앞에 서야 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97년 한보사태에 연루됐던 정치인들에게 일갈하던 검사 출신 초선의원이 8일 서울고등검찰청사 앞에 섰다. 18년이 흘러 그는 현직 도지사이자 피의자 신분이 됐다. 한보사태를 꼭 빼닮았다는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서 부패로 몰린 첫 ‘정치인’ 홍준표(61) 경남지사다.
이날 오전 9시55분 출두한 홍 지사는 장사진을 이룬 취재진을 보고 긴장한 듯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붉은색 넥타이를 매만졌다. 심경을 묻는 질문에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오전 8시 서울 잠실의 자택을 나설 때 “어버이날이라 달았다”며 취재진에 보였던 분홍색 카네이션을 출두 전 들른 변호사 사무실에서 떼어 버렸다.
홍 지사는 카메라 앞에서 짐짓 웃음을 지었지만 ‘충격적 장면’을 오래 연출하기 싫은 눈치였다. 포토라인에 선 지 1분도 안 돼 서둘러 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검사 시절 경험담을 풀어놓은 책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에서 “검찰청 현관에서의 취재 경쟁과 몸싸움 과정에서 거물 피의자는 이미 한풀 꺾인다”고 썼었다.
거침없는 수사로 이름을 날렸던 홍 지사가 ‘친정’을 다시 찾은 건 20년 만이다. 유명 드라마 ‘모래시계’의 원형이 되기도 했던 그는 95년 10월 41세에 법복을 벗었고, 이듬해 2월 정계에 입문했다. 신한국당(현재 새누리당) 소속 의원이던 99년 ‘국회 정보위 529호실 난입사건’에 얽혀 출국금지 조치와 함께 서울지검 남부지청 출석을 통보받았지만 불응했었다.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은 홍 지사의 현직 신분을 고려해 소환조사 준비부터 철저하게 했다. 7일에는 청사 직원들이 검색대 통과부터 엘리베이터 탑승, 조사실 입장까지 동선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피의자 신분으로 고위 간부용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취재진이 몰릴 1층에서 혼잡을 빚는 상황을 피하려는 조치였다. 홍 지사는 김진태(63·14기) 검찰총장과 사법연수원 동기이기도 하다.
수사팀장인 문무일(54·18기) 대전지검장은 홍 지사가 출두한 직후 12층 조사실을 직접 찾아가 1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 홍 지사는 재선 의원이던 2004년 문 지검장이 속해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팀에 뇌물 의혹이 있는 100억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를 제보했었다. 문 지검장은 홍 지사에게 커피를 권하며 조사의 배경 및 진행 방식 등을 부드럽게 설명했다. 홍 지사는 커피를 거부하고 물을 한 잔 요청해 마셨다.
오전 10시17분 홍 지사는 조사실 피의자석에 앉았다. 변호인 1명이 입회했다. 검찰은 진술거부권 등을 포함한 ‘미란다 원칙’을 알리고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상당량의 자료를 제출하고 의혹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인하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됐고 홍 지사가 하고 싶은 말을 상세하게 했다”고 전했다.
홍 지사는 오전 조사를 마친 뒤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약 1시간 동안 보좌진, 변호인과 식사를 했다. 검찰은 주요 피의자의 경우 수사검사와 함께 식사할지, 일행과 별도로 할지 묻는다.
이경원 문동성 신훈 기자 neosarim@kmib.co.kr
“나 떨고 있니”…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의 ‘홈커밍데이’
입력 2015-05-08 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