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네팔 소녀 마야타망의 비극 앞에서 가슴에 돌덩이로 남은 ‘잔인한 4월’

입력 2015-05-03 17:55

기자로서 열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엄마 잃은 네팔 신두파초크의 일곱 살짜리 마야타망의 사연을 글로 옮기면서 눈자위가 자꾸 쑤셨다. 딸 먹일 고사리를 캐다가 돌에 깔려 비명횡사한 젊은 여자를 생각하면서 휘청거리지 않을 재간이 내게는 없었다.

우는 마야타망처럼 눈을 감고 그 돌무더기 속을 생각했다. 그곳은 필시 춥고 어둡고 무거울 것이었다. 세상은 본래 그러한 곳이지만 그것을 돌의 온도와 무게 따위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마야타망은 자라면서 돌에 묻혀 죽은 엄마를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 마야타망에 대해 말할 때면 이 비극을 입에 올리며 가엾어 할 것이다.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서 머리에 돌을 맞고, 산사태로 엄마를 잃어야 했단 말인가. 세상에는 명백한 악행을 저지르거나 선대의 그런 죄업을 지고도 호의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마야타망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지른 죄라면 제 부모에게 투정을 부린 것 이상일 리가 없다. 이 부조리를 누가 어떻게 마야타망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은 죄가 있어서 비극을 당하는 게 아니다. 비극은 종교나 신앙을 가려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해야 옳다.

서울에 돌아와 이 글을 쓴다. 회사로부터 “네팔에 가겠느냐”는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달 26일 오전이었다. 질문을 가장한 그 출장 명령은 당사자의 의사표시를 받아내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이제 와 말하건대 전날 네팔 지진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이미 나의 네팔행을 예감했다. 가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27일 아침 네팔로 떠나면서 가장 핍절한 기사를 한국으로 써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 글로써 한국의 사람들을 네팔로 끌어오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 네팔의 비극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 기사들은 목적이 분명한 글이었다. 첫날부터 1일까지 5일간 한국으로 써 보낸 기사에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파 넣은 사실을 인정한다. 기사가 이래도 되는 것인지 자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참히 파괴된 도시에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일 자정을 넘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보통은 현장에 갈 때 마음이 무겁고, 철수할 때 홀가분한 법인데 이번에는 갈 때보다 올 때의 마음이 무거웠다. 도시의 잔해들을 가슴에 쓸어 담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감정의 체증이 심하다. 그 체증을 이룬 장면들 속에 눈을 감고 우는 마야타망이 있다. 네팔에도 5월에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이나 가정의 날 같은 게 있다면 네팔인들에게 이보다 잔인한 5월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마야타망을 생각한다. 산사태로 엄마를 잃은 여자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스무 살의 마야타망은 13년 전 돌에 맞아 생긴 정수리의 상처를 손끝으로 만져서 그 무늬를 쫓을 때마다 엄마를 생각할 것이다. 중년과 노년이 되어서도 상처는 지우지 못할 것이다. 원통한 죽음을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마야타망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지막일 것이다. 마야타망이 이제부터 어떻게 자라고, 커서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알 도리도 없다. 아가야, 그래도 씩씩하게 살아가거라.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