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볼의 사전적 의미는 야구에서 타자가 친 공 중 파울 그라운드에 떨어진 공이다. 영화 ‘파울볼’은 하나의 의미를 더 부여했다.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까지는 스트라이크로 카운트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몇 번을 치건 다시 한번 타격 찬스를 주는 야구 규칙에서 나온 의미였다.
영화 ‘파울볼’은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 구단인 고양 원더스의 시작과 끝을 담아냈다. 팀은 해체해도 끝까지 야구를 하겠다던 설재훈, 팀의 해체 발표 후 아버지 품에 안겨 서럽게 울던 원년팬 7살 소년 하용수군을 보며 관객들은 같이 울었다. 그리고 독립 야구단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더스의 창단 멤버이자 마지막 선수였던 설재훈과 원더스를 대신해 독립 야구단의 계보를 잇고 있는 연천 미라클의 구단주인 박정근 호서대 체육학과 교수와 선수들에게 독립 야구단의 필요성과 홀로서기를 위한 과제 등을 들었다.
◇버틸 때까지 버텼다=“버틸 때까지 버텨보려고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원더스의 창단 멤버였던 설재훈이 팀의 해체 소식을 접한 직후 한 말이다. 마지막까지 팀을 지켰던 설재훈은 김성근 감독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분량도 가장 많았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 그의 뒷 이야기를 살짝 전했다. SK 와이번스의 육성선수로 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화 2군팀과 경기를 끝낸 설재훈을 만났다. 설재훈은 지난 해 11월 SK 와이번스 퓨처스리그(2군)의 육성선수로 영입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각 구단은 65명의 등록 선수와 육성 선수로 선수단을 구성한다. 등록선수 중 27명만이 1군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다. 설재훈은 프로 무대에서 뛰려면 일단 등록 선수 명단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원더스에서 고된 훈련을 거친 덕은 SK에서 보고 있다. 시즌 개막 전 대만 타이중에서 진행한 2군 스프링캠프에서 세이케 SK 퓨처스 감독은 설재훈을 신인 투수 유상화와 함께 캠프 최우수선수(MVP)로 뽑았다.
그는 “육성 선수기는 하지만 원더스 덕에 프로무대에서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 감사하다”고 했다.
영화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설재훈은 프로무대에 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저처럼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하던 사람들에게 최종 목표는 프로구단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프로구단에 들어가지 못하면 할 게 없어요. 배운 게 야구 뿐인데 말이죠.”
결국 그도 군대에 다녀온 뒤에도 길이 보이지 않자 일본으로 갔다.
그는 “한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의 배팅볼을 쳐주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경기에 나설 기회는 없었다”며 “그래서 일본에 갔더니 독립야구단이 많아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행복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도쿄 사이타마, 시코쿠 등 3개의 독립 리그가 있다. 각 리그에는 3, 4개의 독립 야구단들이 지방정부와 기업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팀을 꾸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독립 야구단 원더스는 경기를 하고 싶어도 할 대상이 없었다. 프로구단의 2군 경기를 일부 번외로 배정받기는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일본의 독립 야구단과 원더스를 거친 그는 우리나라에 더 많은 독립 야구단이 생겼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독립 야구단에서 실력을 쌓아 프로무대에 진출하는 기회도 많아졌으면 했다. 원더스에서도 설재훈을 비롯해 20여명이 프로 무대에 갔다. 송주호는 한화 이글스에서 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프로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설재훈은 “프로구단은 모든 야구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다. SK 덕에 기회를 잡았다”며 “후배들이 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 보루, 미라클을 꿈꾸다=지난 24일 경기도 고양시 고양야구장에서 프로야구 NC 다이노스의 퓨처스리그 팀인 고양 다이노스는 6대 7로 졌다. 상대는 연천 미라클이라는 팀이었다. 미라클은 지난 3월 20일 창단한 신생팀인 동시에 원더스의 해체 이후 한국에 남은 유일한 독립야구단이다.
미라클에서는 현재 23명의 선수들이 뛰고 있다. 그 중 7명은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 등 프로구단 출신이다. 이들이 월급도 받지 않은 채 매월 70만원을 내면서 새벽 6시 30분부터 고된 훈련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야구 선수 생활의 마지막 보루라는 절박함 때문이다.
임광섭은 대학 졸업과 군 제대 후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원더스와 kt 위즈의 트라이아웃에서 탈락한 뒤 선수의 꿈을 접고 NC 다이노스 직원으로 들어갔지만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그는 “옆에서 보는 게 더 고문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미라클로 입단한 이유였다.
한화 이글스 출신의 외야수 공민호는 ‘남을 이겨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의 야구 철학을 미라클에서도 실천하고 있다. 공민호는 “실패가 쌓이면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성공을 하는 발판이 될 것”이라며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라고 했다.
구단도 선수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연천군과 지역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원정 훈련 등 구단을 운영하고 야구 장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연천군은 ‘ISG 미라클’ 구단주인 인터네셔널스포츠그룹(ISG)과 타이틀 스폰서 조인식을 체결하고 팀 네이밍 권리를 양도받아 한 시즌동안 ‘연천 미라클’ 이름으로 구단을 운영하기로 했다. 연고지는 연천베이스볼파크다.
구단주인 박정근 호서대 체육학과 교수는 “우리는 그들에게 야구를 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줬을 뿐”이라며 “독립구단이 3, 4개만 더 생긴다면 프로구단으로 가지 못해 막막한 야구 선수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네셔널스포츠그룹의 대표이기도 하다.
박 교수는 독립 야구단이 선수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국내 프로무대 외에도 호주나 유럽 등 야구 후진국에서 선수나 지도자로 뛸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선수가 원더스에서 뛰었던 ‘저니맨’ 최향남이다. 그는 최근 오스트리아 세미프로리그 다이빙덕스와 계약했다. 오스트리아 북동부 비너 노이슈타트를 연고로 한 다이빙 덕스는 세미프로 1부 리그 팀이다. 현재 오스트리아 1부 리그에는 6개 팀이 있고 팀당 정규시즌 20경기를 치르고 있다. 6개 팀 중 1, 2위는 유럽 챔피언을 가리는 유로파리그 출전 자격을 얻게 된다. 경기력은 한국 고교야구 1~2학년 수준이다.
기회도 왔다. 호주 야구협회에서는 미라클을 초청한 상태다.
박 교수는 “비시즌 기간에 호주로 와서 세미프로 팀들과 경기를 해 달라고 했다”며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선수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선수들의 생각도 유연하다.
임광섭은 “프로야구 선수가 일차 목표”라면서 “하지만 일본을 가든, 호주를 가든 야구 선수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버틸 때까지 버텨보려고요”… 마지막 보루, 기적을 꿈꾸다
입력 2015-04-30 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