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볼티모어 흑인 장례식 뒤 폭동… 주 방위군 투입, 경찰 15명 이상 부상

입력 2015-04-28 18:14

경찰 체포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구금돼 일주일 만에 사망한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25)의 장례식이 엄수된 27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는 격렬한 항의시위에 휩싸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흥분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투척했고 경찰과 주 방위군이 진압에 나서 충돌하면서 현지에선 1968년 발생한 흑인 폭동 이래 최대·최악의 인종갈등 사태로 비화되는 양상이다.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는 이날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볼티모어시의 요청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최대 5000명의 주 방위군 투입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스테파니 롤링스 블레이크 볼티모어 시장도 기자회견을 통해 시내 공립학교 전체에 휴교령을 내리고 28일부터 일주일간 오후 1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전날도 2000여명의 시위대가 항의 집회와 가두행진을 벌여 34명이 체포된 가운데 이날 볼티모어의 한 교회에서 열린 그레이의 장례식에는 가족과 지역 주민들이 대거 참석했다. 2500명을 수용하는 교회의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인파는 넘쳐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브로데릭 존슨 비서관 등 백악관 직원 3명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지난해 뉴욕에서 발생한 백인 경관의 ‘목조르기’ 사건으로 숨진 에릭 가너의 딸 에리카 가너(24)도 참석해 “우리 사회에는 책임감도, 정의도 없는 것 같다. 마치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활동하던 195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장례식 동안에도 교회 밖에선 경찰의 가혹행위와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장례식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폭력시위는 격해졌다. 사법정의를 외치던 시위대는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경찰의 진압에 돌멩이와 벽돌로 저항하며 격렬히 충돌했다. 볼티모어 서부 슬럼가 일대의 폭력 시위로 쇼핑몰과 약국 등 주변 상점은 약탈당했고 곳곳에서 경찰 차량이 불탔다. 이 과정에서 최소 15명 이상의 경찰이 부상을 입고 후송됐으며 한 명은 혼수상태라고 경찰은 전했다. CNN방송 등 현지 언론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폭력으로 얼룩진 시가지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현지에서 경찰은 사실상 통제력을 상실한 것으로 전해졌다. 호건 주지사는 “시위와 폭력은 엄연히 다르다. 약탈과 폭력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며 주 방위군 1500명을 우선 현장에 급파했다.

날이 저물어도 시위가 멈추지 않자 미 프로야구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경기가 취소되고 지하철역이 폐쇄되는 등 볼티모어 전역은 무법천지로 변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레이의 가족들은 “폭력사태에 충격을 받았다. 항의운동이 폭력으로 얼룩지지 않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명 첫날부터 난관에 직면한 미국 첫 흑인여성 법무장관 로레타 린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볼티모어 사태를 보고한 뒤 발표한 성명에서 “볼티모어 시민은 비폭력 원칙을 준수해 달라. 경찰관을 다치게 하고 평화를 깨뜨리는 일부 시민의 무분별한 폭력 행위를 규탄한다”며 자제를 촉구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롤링스 블레이크 시장과의 통화에서 연방 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지원을 다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며 호건 주지사와 대책을 논의했다.

그레이의 사망에 관여한 경찰 6명이 정직처분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진 못하고 있다. 그레이는 지난 12일 체포 과정에서 목 부위와 척추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여러 차례 응급조치를 요구했지만 경찰이 이를 묵살했다. 경찰은 30분여 동안 세 차례나 정차하는 등 늑장 이송한 뒤에야 응급처치를 받게 했다. 그레이 가족 변호사는 지난 19일 “뒤늦게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큰 수술을 받았으나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그레이가 숨졌다”고 밝혔다.

경찰은 1차 조사결과 “지나친 폭력 사용이 확인되진 않았다”면서 부검 결과를 토대로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지난해 발생한 ‘퍼거슨 시위’ 이후 또 한 명의 흑인이 경찰의 공권력 남용으로 희생됐다는 점에서 흑인 비율이 높은 볼티모어 시민들의 흥분과 분노가 거세다. 자칫 2000년대 최악의 대규모 폭동으로 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