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로 화려한 봄날을 보내고 있는 박서보 화백(84)이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의 조현화랑에서 묘법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는 단색화의 물꼬를 튼 ‘묘법’의 후기작을 선보인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색채의 소품 15점과 100호 이상의 대형 작품 10여점이 전시된다.
‘살아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 화백은 4월 23일 오후 5시 초대전 오픈식에 참가했다. 당초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참가가 불투명했으나 병세가 호전돼 극적으로 참여했다.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는 열정의 작가 앞에 병마는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거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했다. “요즘 단색화 얘기 많이 하는데 단색화는 색의 문제가 아니에요. 서양의 모노크롬은 색에 반대되는 검거나 흰 것이라면 한국의 단색화는 거무스름하거나 희멀건 색, 즉 자연과 전통의 합일입니다.”
6월 8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만든 작품 30여 점을 선보인다. 한층 깊이 있고 다양해진 색채의 ‘후기 묘법’ 시리즈를 감상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의 뿌리는 자연이다. 작가는 한지에 무수히 선을 그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입체적인 선을 ‘수신(修身)’의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단색화의 기본은 행위의 무목적성과 반복성에서 찾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 그림은 수신의 도구가 되는 거지요. 비우고 비우다 보면 채워지듯 반복적으로 선을 그으며 마음 깊숙한 곳의 모든 경험을 발산하는 게 그림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단색화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외국으로 나가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술은 풍토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들도 뉴욕에 가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숱하게 봤다고. 척박하더라도 내 땅에 뿌리박고 작업하는 게 사명이라고 여긴단다.
그는 1950~1960년대 무명 화가 시절,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꼭 사고야 말고, 이를 갚기 위해 죽어라고 원고를 썼다고 한다. 그 원고가 감각으로 작용해 오늘날의 작업이 나왔다며 웃었다. 조현화랑 전시는 1991년 이후 7번째다.
그는 평소 “나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형태조차도”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러나 “밤에 봤던 한강 다리, 아내와 여행하며 봤던 제주도의 해변 풍경 등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서보의 작업 세계는 57년에서 60년대 중반까지의 원형질 시대, 60년대 중반에서 70년까지의 유전질 시대, 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후반으로 이어지는 묘법 시대, 그리고 8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의 후기 묘법 시대로 구분 지을 수 있다.
‘묘법(猫法)’이란 ‘그린 것처럼 긋는 방법’이라고 풀이되며, 프랑스어 Ecriture는 ‘쓰기’란 의미를 지닌다. 제목과 같이 ‘묘법(猫法), Ecriture’는 선을 긋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캔버스를 물감으로 뒤덮고 그것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물감으로 지워버리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과정과 결과가 바로 작품이 된다.
그는 2000년대 들어 이전의 무채색 중심의 모노톤 화면에서 화려한 색채의 화면으로 변화했다. 하나의 강렬한 단색으로만 보이는 것과는 또 다른 경외감을 전한다. 특히 회화의 행위성이 끝나면서 작품도 끝난다는 서구의 방법론을 넘어 시간이 개입되면서 변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완성에 이른다는 동양 회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는 올해도 단색화로 해외 러브콜을 받고 있다. 5월 미국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열고 이어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미술 특별전인 ‘단색화’ 전에 참여한다. 하루에 8시간 작업한다는 거장의 열정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051-747-8853).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단색화의 봄날 박서보 화백 부산 해운대 조현화랑서 ‘묘법’의 묘미를 보여주다 6월 8일까지 개인전
입력 2015-04-27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