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복싱만큼 드라마틱한 운동도 없다. 그래서 실존인물과 가공의 인물을 망라해 수많은 복싱 영화가 만들어졌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신데렐라 맨’, 존 보이트가 아버지 복서로 나와 관객의 눈물을 짜낸 ‘챔프’, 마크 월버그와 크리스천 베일이 형제복서로 나온 ‘파이터’, 제임스 얼 존스가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실존인물 잭 존슨으로 분해 인종차별문제까지 건드린 ‘위대한 희망(The Great White Hope)', 윌 스미스가 무하마드 알리를 연기한 ’알리‘, 그리고 아주 옛날 영화로는 존 가필드가 복서로 열연한 1947년작 ’육체와 영혼(Body and Soul)'도 있다.
요즘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처럼 여자복싱을 다룬 영화도 나오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복싱은 남자의 운동이라 웬만한 남자 배우치고 복싱선수 역할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클라크 게이블, 에롤 플린, 로버트 테일러, 존 웨인, 록 허드슨, 토니 커티스, 윌리엄 홀든, 오디 머피 등등. 오죽하면 희대의 꽃미남 알랭 들롱과 가수 출신 엘비스 프레슬리까지 복싱선수로 나섰으랴.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 그리고 ‘키드 갤러해드(1962)’가 각각 그들이 복싱선수로 나왔던 영화였다.
그러나 이런 특이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복싱영화’하면 뭐니 뭐니 해도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와 로버트 데 니로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성난 황소’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실존 복서 제이크 라모타의 영욕에 찬 삶을 그린 ‘성난 황소’는 물론 정식 시리즈만 5편, 번외랄 수 있는 ‘록키 발보아’까지 치면 6편이나 만들어진 ‘록키’ 시리즈가 워낙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있는 탓에 다른 복싱영화들은 가려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중에도 빛을 발하는 명작들은 있다.
대표적인 게 폴 뉴먼 주연의 1956년작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과 커크 더글러스의 출세작인 ’챔피언(1949)‘이다. 앞의 것은 실존인물인 1940년대의 미들급 세계 챔피언 록키 그라지아노의 반생을 다룬 일종의 전기영화로 명장 로버트 와이즈가 감상을 배제하고 드라이하게 그려내 좋은 평판을 받았다. 뒤의 것은 가공의 ’헝그리 목서‘를 주인공으로 그의 부침(浮沈)을 그린 일종의 느와르로 분류된다. 감독은 마크 롭슨이지만 명감독 겸 제작자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을 맡았다. 그때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더글러스를 이 얼굴이면 쓸모가 있겠다 해서 알아보고 기용한 것도 크레이머였다.
‘상처뿐인 영광’ 역시 그보다 2년 전 ‘은배(銀杯)’로 데뷔한 뒤 말론 브랜도의 아류 정도로 여겨지던 뉴먼을 출세시킨 걸작이다. 당초 그라지아노역으로 제임스 딘이 출연할 예정이었고 그래선지 그라지아노의 극중 연인으로 딘의 실제 여자친구로 알려진 피어 앤젤리가 낙점됐으나 촬영에 들어 가기 앞서 딘이 교통사고로 요절하는 바람에 뉴먼이 대타로 행운을 잡았다고 한다.
록키 그라지아노는 원래 뉴욕의 이탈리아계 뒷골목 건달 출신으로 같은 이탈리아계인 스탤론의 영화 ‘록키’도 그에게서 이름을 따오는 등 영감을 얻었다. 이 영화는 특히 나중에 대스타가 되는 스티브 맥퀸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하다. 맥퀸은 이름 소개도 없이 뒷골목 건달로 출연해 폴 뉴먼과 건물 옥상에서 싸우는 장면에 얼굴을 한 차례 비친다. 그러나 워낙 흐릿하게 빨리 지나가는 탓에 눈썰미가 어지간히 좋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두 사람은 20년 뒤인 1974년 영화 ‘타워링(Towewring Inferno)'에서 양대 스타로 재회한다. 사족--원제는 그라지아노가 챔피언이 되고 난 뒤 연인에게 읊조리는 말로 ‘somebody up there(저 위의 누군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난 운이 좋았어.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봐.”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이번 대전도 언젠가는 극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글쎄 경기내용이 얼마나 극적일지 기대된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